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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의 변천-송두리째 무너지는 전통윤리3

세태풍자 2006. 10. 28.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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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시대의 효]
 
 사람들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효는 농업 시대의 효이다. 그래서 보통 효라고 하면 바로 이 농업 시대의 효를 의미한다. 그런데 어느새 산업화 시대를 지나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었으니,
 효에 대한 부모와 자식간의 의견 차이로 심각한 갈등이
 생길 건 뻔한 이치다.
 
 이 농업 시대의 효가 가장 강조된 나라는 한국이고 두 번째로 강조된 나라는 중국이었다. 유교가 국가의 지배 이념이 되면서 충효가 국가와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본 정신으로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이 중에 국가에 대한 충성, 군왕에 대한 충성은 필연적으로 군사력이 바탕이 되는 것이었는데, 전쟁 중에는 그 군사력으로 적을 물리치는 것이 군왕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평화가 지속되는 중에는 군왕은 군사력이 강한 신하가 오히려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그래서 충성은 군사력이 제외된 정신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 같은 현상은 중국의 한, 당, 송, 명과 한국의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충성이 무력을 동반하지 않은 철저한 정신적인 면으로 변질되는 것은 중국의 송과 한국의 조선이었다. 이 두 나라는 신하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 군사력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군사력을 배제한 기형적 충성심을 강요한 성리학]
 
  성리학이 충효를 이론적으로 고도로 세련화시켰지만, 충은 군사력이 배제된 기형의 것이었기 때문에 외국의 침략을 받으면 정신적으로 충성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충천했지만, 현실적으로 군사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했기 때문에
 절대 정신적으로 항복은 안 했지만
 국토는 외적의 말발굽에 순식간에 유린되었고
 백성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끝내 군왕도 온갖 치욕을 다 당했다.
 
  송의 휘종과 흠종은 포로 신세로 전락했고, 조선의 인종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머리에 피가 나도록 조아리는 치욕의 항복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끝내 송은 드높은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몽골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대체로 송의 성리학을 이어받은 명도 왕양명이 나와 그 폐해를 극복하려고 양명학을 주창하며 애썼지만, 끝내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충성심을 강요하다가 청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게 되었다.
 
  조선도 그 당시 풍토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었던 이순신이라는 상상을 초월한 한 인물이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된 충성심을 발휘하는 바람에 임진왜란 때는 용케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지만, 300년 후 결국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 후에도 신하에게 군사력은 전혀 주지 않고(태종과 세조가 단행한 사병 혁파의 전통이 금과옥조처럼 지켜짐) 정신적인 충성만을 강요했기 때문에 한말에는 다들 충성심이야 하늘을 찔렀지만,
 일본군 겨우 3천여 명에게 전쟁도 한 번 못해 보고 나라를 빼앗겼던 것이다. 다만 정신적인 충성심은 이 지구상에 둘도 없었기 때문에 독립 운동은 자기 일신을 돌보지 않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벌였다.
 식민지하에 그 어떤 나라도 한국처럼 처절하게 독립 운동을 한 나라가 없다. 이건 분명 성리학의 공로이다.
 
  흔히 임진왜란시 성리학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왜구의 침략에서 나라를 지켰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리학을 옹호하기 위해 엄청나게 과장하고 포장한 말이다.
 군사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이 하는 위안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는 임진왜란 때보다 더 한층 충성심을 강조한 한말의 성리학이 어찌하여 힘도 한 번 못 쓰고 나라를 빼앗겼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할 수 없다.
  너무도 간단한 원리를 애써 외면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엉뚱한 논리를 개발할 필요가 없다.
 
  국사학계에서는 아직도 여기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역사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머리가 꽉 막혀 있기 때문이다.
 
  의병은, 이순신이 바다를 장악해서 보급이 끊긴 왜병이 더 이상 평양 이북으로 북상하지 못하고 배가 주리고 이윽고 전염병까지 들어 허덕이고 있을 때 산발적으로 나타나 화풀이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전혀 전쟁의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숫자는 많았지만, 그들은 일본의 강병에 비해 오합지졸에 지나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은 전국 시대가 17세기 초가 되었어야 종식되었기 때문에 신하들의 무장을 도저히 해제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서는 충성이 효도보다 훨씬 강조되었는데, 일본에서 충성은 군사력이 뒷받침되는 잠재적인 위험이 뒤따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950여년 전 통일 신라의 상황과 비슷했다.
 
 [중국의 충효]
 
  성리학을 다같이 국가적 이념으로 받아들였지만, 동양 삼국의 효는 아주 달랐다. 676년 당을 몰아내고 삼국을 실질적으로 통일한 이후, 내전이 영구적으로 종식되고 이따금 가혹한 외침이 있긴 했지만, 중국이나 유럽 입장에서 보면 일제에 의한 강제합병까지 무려 1,200년이란 어마어마하게 긴 세월 동안 평화를 구가한 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효를 강조했다.
  한국의 역사를 끝없는 외침과 굴종과 사대와 한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이 말이 충격과 경악 그 자체거나 한낱 미치광이의 잠꼬대로 들릴 것이다.
 
  한편 600년 전쟁(춘추전국), 400년 평화(한), 400년 전쟁(삼국시대, 위진남북조, 5호16국), 300년 평화(당), 300년 전쟁평화 공존(북송 남송) 등 끊임없이 전쟁과 평화가 교차했던 중국은 충효 양쪽을 강조했다. 반면에 늦게까지 내전으로 시달렸고 전국 시대 이후에도 제후들의 무장을 끝내 해제시키지 못했던 일본은 충을 강조했다. 일본에는 효가 별 의미가 없었다.
 
  평화는 대개 내전을 종식시키는 것으로 성취된다. 중국은 무려 550년간 지속된 내란 시대인 춘추전국 시대(BC 770~ BC221)가 종식되면서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다. 그러나 곧 진시황이 죽으면서 잠시 내전의 회오리바람에 빠진다. 다행히 전쟁이 항우와 유방이라는 두 세력간의 다툼이었기 때문에 평화는 쉽게 찾아온다.
 
  이후 중국은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00여년간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평화가 찾아오자 당연히 평화에 알맞은 국가 이념을 찾게 된다. 제일 적당한 철학이 바로 공자의 이론이었다. 노자는 국가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한무제(재위BC141~87)가 성인이 된 이후는 위정자는 이를 전혀 논의의 대상에 넣지 않았다. 무제 이전에는 문제(재위BC180~157), 경제(재위BC157~141)가 노자를 신봉하여, 국가의 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특히 어린 무제를 등극시킨 그 할머니 두태후의 입김은 대단했었다. 그녀는 열렬한 노자 팬으로서 유학자를 사갈시했다. 경제 때 원고생이란 명성이 자자한 유학자가 있었는데, 두태후로부터 <노자> 강의를 부탁 받자, '노자의 말 따위는 상놈의 허튼 소리'라고 했다가 돼지우리에 갇혀 돼지한테 잡아먹힐 뻔했었다.
 
  현실적으로 노자를 신봉하게 되자 정실 인사, 관료의 기강 문란 등의 현상이 생겨났다. 한무제는 즉위 6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이미 즉위 2년에 발탁해 두었던 저 유명한 유학자 동중서를 앞세워, 국가 체제를 일신하여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었다. 그가 칼과 붓을 동시에 사용하여 국가의 틀을 다잡지 않고 섣부르게 노자 사상에 심취하여 불로장생이나 꿈꿨으면, 역대 왕조 중 중국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한 나라 400년 평화는 결코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때 칼의 충과 붓의 효가 하나로 합해지면서 하나의 단어 충효가 비로소 확고히 자리잡았다고 본다. 우리가 아는 중국의 충효는 바로 한무제 이후의 것이다. 국가라는 것은 확고한 군사력의 울타리 안에서 분명한 이념의 바탕 위에 법과 제도의 그물 속에 질서정연하게 짜여지지 않으면, 아무리 고상한 철학과 달콤한 종교, 아름다운 예술로 장식해도 이내 무너져 국민들이 도탄에 빠지고 혼란, 내전,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전쟁의 한 가운데 태어난 공자(BC551~479)는 정교하고 예리한 철제 무기의 대량 살상 능력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비록 전쟁은 있었지만, 철기 시대에 비해서는 낭만적이기만 했던 청동기 시대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청동기 초기의 요순 시대가 가장 큰 이상이었지만, 차선책으로 청동기가 상당히 발달한 주공(周公)의 나라 주(周)를 이상으로 삼았다.
 
  공자에게 전쟁은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었다. 따라서 적극적인 전쟁을 통해 평화를 가져오려는, 대량 살상을 동반한 끝없는 소모전에 그는 절망했다.
 그런 식으로는 평화가 올 수 없다고 확신했다.
  모든 나라가 방어용 군사력을 충분히 갖추고 평등한 입장에서 주 나라를 상징적인 명분으로 삼아 옛날처럼 본가(주 나라)에게 충성을 다 바칠 것을 기대했다.
 그가 대의명분과 예를 중시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것은 바로 무기 대신 정신으로 질서와 평화를 이루는 수단이었다.
 그는 중원 전체가 한 가족처럼 지내길 원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에게 충성은 효를 확대한 것이었다.
 
 공자는 주자와는 달리 군사력을 외면하진 않았다. 단지 군대를 방어용으로 파악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공자는 완전한 평화가 오면 모두 무기를 버리길 원했을 것이다. 조선이 실지로 그랬다.
 
  공자는 중원을 무력을 통해서 하나의 나라로 통일할 것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 시기에는 그의 이론이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왕도 그의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문명이라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뿐 뒤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리한 철제 무기를 버리고 무딘 청동제 무기를 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자동 소총 대신 화살로 무장할 나라가 지금 어디 있겠는가.
 
  공자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그의 사후 200여년 후에 중원은 군사력이 강한 무지막지한 진 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덕분에 그의 사상은 진에 이어 등장한 한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정신적 무기가 되었다. 단숨에 중원 전체에 공자가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이 정신적 무기의 핵심이 충효였다.
 
  신하들의 무장을 완전 해제할 정도의 힘은 없었던 황제 유방은 그 군사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대신 (그 힘이 황제를 위협할 정도라고 판단이 되면 한신의 경우처럼 아예 제거해 버렸다) 자기 아들들을 중심으로 황족들에게 그 군사를 맡겼다. 공자의 이상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황제가 전국을 한 손에 쥠으로써 물리적으로 충성을 확보한 진시황의 군현제를 폐지하고, 한의 황제는 전국을 장악하긴 하되 유씨만으로 왕을 삼아 효를 바탕으로 정신적인 충성을 확보했다.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주 나라의 봉건제를 부활했던 것이다.
 
  단 주나라보다는 훨씬 타이트하게 만들었다. 진의 군현제를 절충해서 제후의 군사는 황제만이 지휘할 수 있었다. 황제가 위험하면 언제든지 왕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황제를 구해 주어야 했다. 이는 위기 시 아무도 황제를 도울 수 없었던 진 나라의 군현제와 대조된다.
 
  한은 이런 식으로 군사력이 있는 충성을 요구한 것이다. 물론 반란의 위험성은 상존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유씨였기 때문에 효를 다할 것이라 믿었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군사 지휘권은 황제가 장악한 것이다. 만약의 변란이 일어나더라도 결국 유씨가 천하를 잡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실지로 왕망이 잠시 설친 후에 같은 유씨 출신인 유수가 황제에 올라 광무제가 되었다.
  왕의 승상도 황제가 직접 임명했다. 그래서 이를 봉건제라 하지 않고 군국제라고 한다.
 
  한의 황제들은 공자의 이론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현실적인 방식을 가미하여 효와 충성을 일치시켜 항구적인 평화 대책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진시황에게 효란 것은 의미가 없었다. 자기 생부일지도 모를 여불위도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가차없이 죽여 버렸다. 유교로 말하면 불효막심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필요한 것은 충이었다.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가정을 국가 위에 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겐 전쟁에 알맞은 이념인 충이 중요했지, 평화에 알맞은 이념인 효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평화를 항구적으로 확보한 한 고조는 그게 아니었다. 효도 매우 중요해졌다.
 물리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충은 기본적으로 물리력에 기초를 둔 반면에 효는 기본적으로 정신에 기초를 둔 것임을 그는 알았다고 본다.
 
  각 지방의 왕은 아버지에 효도하는 것이 곧 나라에 충성하게 된 것이다. 또는 본가(종가, 큰집)에 넓은 의미의 효를 다하는 것이 곧 황제에게 충성하게 된 것이다.
 충효가 하나의 개념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마 충효란 단어가 이 때 하나의 단어로 좀 어색하게 결합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다가 한무제 때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 단어로 정착되었던 것 같다. 충효란 말 자체는 이미 주 나라 때 존재했을지도 모르겠다. 조사를 해 볼 일이다. 공자의 사상은 기가 막히게 평화를 정착시킨 황제의 이해와 일치했다.
 
  한 나라의 사상은 그 아래 작은 단위의 지방과 가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효를 담보로 하는 충성이 어디서나 강조되었다. 초기에는 충성이 강조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효가 더 강조되었다. 평화시에는 충성이라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것이 우스갯소리가 되기도 한다.
  평화시에는 국가는 멀리 있고 가정은 가까운 데 있다. 전쟁 때는 누구나 국가를 생각하지만, 평화시에는 국가는 기억에서 갈수록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이젠 각 가문마다 가장이 중심이 되어 효를 요구했다. 대대적인 의식화 교육이 시작되었다. 삼강오륜을 모르면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추락했다.
 
  어쨌건 중국은 충효가 늘 공존하는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아니면 송의 경우처럼 실지로는 그러지 못하면서 그것을 이상시했다. 실지로 중국에서는 이 충효보다 더 중요한 개념은 의(義)이긴 하지만. (이 의는 삼국지연의와 수호지에 아주 선명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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