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자존심이 곧 목숨이거늘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장렬히 싸우다 순국한 학봉 김성일 집안.
이 집안의 애국정신은 그 직계후손들과
정신적 자식인 제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전해진다.
학봉의 퇴계학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제자이자, 학봉의 11대 종손인 김홍락은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제자만 60명이나 배출했고, 학봉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도 무려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1. 퇴계 학풍 이어온 항일 독립운동 명문가
최근 미국의 어느 동양학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홍콩, 대만, 싱가포르를 포함한 아시아의
유교문화권 국가들 가운데 유교문화의 요소를 아직까지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한국 다음에 일본이고
다음이 중국이다. 한국이 일본이나 중국보다 유교문화의 영향이 더 많이 남아있다는 조사 결과가 주목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유교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어디인가?
충청이나 호남보다는 영남 지방이고 범위를 더 좁히자면 그 중에서도 안동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동일대에 밀집해있는 수많은 고택과 종택들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안동 일대에 이처럼 유교문화가 보존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퇴계선생의
영향이 크다. 주자성리학을 한국에 뿌리내리게 한 인물로 볼 수 있는 퇴계는 오늘날까지 영남과 안동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마음속의 어른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퇴계의 양대 제자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과 서애 유성룡이다. 안동 일대의
명문가는 거의 퇴계에 연원을 두고 있지만, 퇴계 다음으로는 거의 학봉, 서애와 직 ·간접으로 연관돼 있을 만큼 두 사람의 영향력이
크다.
2. 퇴계의 양대 제자, 학봉과 서애
이 두 제자는 당연히 개성도 달랐다고 전해진다. 서애가 복잡한 현실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데
주력한 경세가(輕世家)로서의 측면이 강하다면, 학봉은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의리가(義理家)로서의 측면이 강했다고 한다. 유학이 추구하는 양대
날개가 바로 경세와 의리인데, 서애와 학봉이 각각 이를 대표했던 셈이다.
학봉 집안과 서애 집안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고택으로도 유명하다. 학봉 집안의 고택을 보면 학봉의 아버지인 청계공이 살았던 내앞[川前]의 대종택과 그리고 학봉 본인이 살았던 학봉종택이
유명하다. 한 집안에서 알려진 종택이 둘이나 있는 것이다. 서애 집안도 그러하다. 하회마을에 가면 서애의 아버지가 살았던 양진당(養眞堂)과 서애
본인이 살았던 충효당(忠孝堂)이 유명하다.
한 집안에 종택이 여럿인 집안은 학봉과 서애 말고도 안동일대에 많이 있다. 집안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 살았던 대종택이 있고, 여기서 다시 갈라져 나간 파종택(派宗宅, 소종택)이 여러개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대종택과
파종택이 동등한 비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두 집안은 학봉의 종녀가 두 명이나 서애 종택의 종부가 되는등 오랫동안 특별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학봉종택과 서애종택을 놓고 보면 상대적으로 서애 종택인 충효당이 세간에 더 많이 소개 됐다. 충효당이 있는 하회마을이 몇 년전
영국 여왕이 다녀가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 졌기 때문이다.
금계 마을에 자리잡은 학봉종택(風雷軒)은 영남 일대에서는 명성이
높지만 전국적으로는 충효당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다. 그러나 학봉종택은 역사적으로나 풍수적으로나 그리고 종택이 지니고 있는 품격으로 볼 때
안동일대를 대표하는 고택중의 하나이다.
학봉 김성일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은
선비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건 인물이었다. 임금 앞에서도 할 말은 하고야 마는 강직함과, 임란 전 일본에 통신사로 갔을 때 일본인들에게
보여준 조선 선비로서의 자존심과 격조 있는 태도는 오늘날까지도 영남과 안동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3. 묘소 때문에 중앙선 철로가 바뀐 사연
학봉에 대한 영남 선비들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중앙선 철도의 노선을 우회하게 만든 사건이다. 중앙선은 서울 청량리에서 경북 안동까지 가는 철도 노선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을 처음 설계할 때, 그 노선이 학봉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와룡면 이하동 가수천을 관통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설계대로라면 학봉 묘소의 내룡(來龍)이 끊어지게 된다. 풍수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 이는 학봉에 대한 엄청난 불경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학봉의 제자들과 후손을 포함한 영남 유림 수백 명이 들고일어나 총독부에
진정서를 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설계를 맡았던 일본인 책임자 아라끼(荒木)란 사람도 학봉이 영남에서 존경받는 큰선비임을 알고 기꺼이
철도 노선을 수정했다고 한다. 학봉 묘소를 관통하지 않고 우회하도록 설계 변경을 한 것이다.
이 설계 변경으로 원래 계획에
없던 터널을 다섯 개나 새로 뚫어야 했다. 청량리에서 안동까지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유난히 터널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 원인이 바로 학봉의 명성
때문이었음이 나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박 대통령이 고속도로를 만들던 70년대도 아니고,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중앙선의 철도 노선을
바꿨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임이 틀림없다. 학봉 집안이 지닌 권위와 사회적 영향력은 일제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학봉의 행적 가운데 개인적으로 관심 가는 부분은 학봉이 호남 선비들과 맺은 인연이다. 학봉은
호남 지역 사람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었는데, 호남과 별다른 인연이 없던 다른 영남 출신 선비들과 비교해 볼 때 이는 매우 이채로운
부분이다.
먼저 광주 무등산의 제봉 고경명 집안과의 인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세 노인 고경명은 아들 셋 가운데 두
아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가서 삼 부자가 금산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고, 당시 16세이던 셋째아들 용후 만큼은 안동의 학봉집안으로 보내 대를
잇도록 했다. 이때 고경명의 셋째아들을 비롯한 고씨 가족 50여 명을 받아들여 수년간 보살펴준 사람이 바로 학봉의 부인과 아들들이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절박한 시기에 학봉 가족들과 제봉의 가족들은 동고동락한 것이다. 고경명이 전쟁터로 가면서 마지막 남은 핏줄하나를 의탁한 곳이
안동의 학봉 집안이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학봉을 신뢰했는지 알 수 있다.
학봉이 전라도와 또 다른 인연을 맺은 것은 나주목사 재임기간이었다. 학봉이 고을을 맡아
다스리기는 나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그는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1584년에 나주지역 선비들과 합심하여 나주 금성산 대곡동에
대곡서원(大谷書院, 나중에 景賢書院으로 개명)을 세웠다. 대곡서원은 나주에 세운 최초의 서원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그전까지
나주에는 서원이 없었다. 학봉이 나주목사로 와서 처음으로 세운 것이다. 나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에는 서원보다는 누정(樓亭)을 중심으로 한
선비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 일대에 분포해 있는 수백 여 개 누정이 말해주는 것처럼 호남에서는 서원보다는 누정이 발달해 있었던
반면, 영남지역에서는 서원이 발달해 있었다.
4. 영남학풍의 교두보 '대곡서원'과 전라도
경상도 선비들이 서원에 모여 학문을 논했다면 , 전라도 선비들은 누정에 모여 학문을 논했다고나
할까. 산이 많아 농토가 적은 경상도보다는 농토가 많고 물산이 풍부한 전라도가 아무래도 먹고사는 것이 풍요로웠고, 그 풍요가 누정문화의 만개로
이어진 것이다.
서원과 누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서원에서 토론한 주제가 철학이었다면, 누정에서는 문학이라고 보면
된다. 나는 이 차이를 철학과 문학의 차이로 해석하고 싶다. 학봉이 나주에다 대곡서원을 세운 것은 영남의 철학, 즉 퇴계의 철학이 전라도로
들어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호남의 가사문학과 영남의 퇴계 철학이 직접적으로 만나는 장이 바로 대곡서원이었다.
대곡서원에
처음 배향(配享)된 다섯명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었다. 이들은 모두 영남학파의 거유들로 이른바 '동방오현'으로 꼽힌다.
얼마 뒤 유일하게 호남출신인 기대승이 추가 배향되었고, 100여 년 후인 1693년에는 학봉 자신이 배향 인물에 추가됨으로서 대곡서원은
영남학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경상도 사람인 학봉이 객지인 전라도에서 대곡서원을 세울 때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사람은
나사침(羅士沈)을 필두로 한 나주 나씨 집안이었다. 나씨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서원을 세울 수 있었다. 나씨들은 조선중기 이후로 전라도
남인(동인)의 핵심 세력 역할을 했고, 이후 정여립 사건(1589)과 무신란(1728)에 연루되어 서인들과 노론 측의 공세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면서도 19세기 말 갑오동학 때까지 여전히 그 세력을 유지해온 명문가 이다.
갑오년에 동학군들이 전주성을
함락하고도 나주성은 끝내 함락하지 못한 원인도 알고 보면 나씨들이 나주의 밑바닥 인심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나씨들이 16세기 후반
학봉과 연합하여 전라도에 영남학풍의 교두보라 할 수 있는 대곡서원을 세운 것이다. 오늘날에도 두 집안의 관계가 지속되는지는 모르지만, 16세기
후반 대곡서원 설립 당시에는 대단히 보기좋은 관계였다는 사실을 밝혀두고 싶다.
5. 퇴계학통 정맥을 두 번이나 이은 영광
학봉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학봉집안에서 퇴계학통의 정맥(正脈)을 두
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이다. 학봉이 한번 받고, 그 다음에 학봉의 후손인 서산(西山) 김흫락(金興洛, 1827-1899)이 다시 받았다. 퇴계의
학통을 한 집안에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받았다는 것은 영남사회에서 대단히 영광으로 받아들여진다.
동양 정신사에서 정맥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동양의 유 · 불 ·선 삼교에서는
공통적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전법(傳法)을 대단히 중시한다. 법을 전한다는 것은 생명을 전하는 것이요, 죽음을 극복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법을 전할만한 제자를 만나지 못하면 생명이 끊어지는 것이므로 스승은 자기의 법을 전할 제자를 찾기위해 고심한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전수할 수 는 없다. '그릇이 아닌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는다[非器者 不傳]' 만약 그릇이 아닌 사람에게 법을 전하면 여러 가지 사회적
부작용을 초래하기 때문에 결국 하늘에서 견책을 받는다고 되어있다.
제자도 스승을 찾아 헤매지만 사실 깊이 들어가 보면 스승을 제자를 찾기위해 기울이는 노력이 훨씬
더 크다. 스승은 제자를 알아 볼 수 있지만 제자는 스승을 알아 볼 수 없다. 여기서 전법제자, 즉 정맥을 받는 적전제자(嫡傳弟子)가 지니는
의미가 있다. 동양의 종교와 학문은 문자나 책을 통해 전달되는 부분 외에도 스승과 제자간의 내밀한 구전심수(口傳心授,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침)를 통해 전달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이 구전심수는 오직 적전제자에게만 전한다.
구전심수로 전달된 내용은 적전제자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 불가에서는 적전제자에게 스승이 그
전법의 징표로 사용하던 의발(衣鉢)을 전수했고, 도가에서는 문파에 따라 다르지만 대게는 보검(寶劍)을 전했다. 유가에서는 스승이 보던 책이나
서첩을 전해주는 경우가 많앗다. 물론 이러한 물질적인 징표보다 심법(心法)을 전수받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만 말이다. 퇴계학통의 정맥을
학봉집안에서 두 번이나 받았다는 것은 퇴계의 정신이 학봉집안에 살아 있다는 말과 같다.
퇴계의 학통이 전수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퇴계는 1566년 학봉의 나이 29세 때 요·순·우·탕·문왕·주공·공자·주자에 이르는 심학(心學)의 요체를 정리한 '병명(屛銘)'을
손수 써주었다. '병명'은 퇴계가 학봉에게 전해준 일종의 의발이다.
퇴계의 정맥은 학봉에게서 장흥효(張興孝)- 이현일(李玄逸)- 이재(李裁)- 이상정(李象靖)-
남한조(南漢朝)- 유치명(柳致明)에 이르렀으며, 유치명에서 다시 학봉의 11대 종손인 서산 김흥락에게 전해진다. 김흥락이 퇴계학통의 정맥을
받았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느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그 기쁨보다는 더 큰 사회적 책임이 수반하는 자리였다. 퇴계의
적전제자이자 동시에 학봉 집안의 종손이라는 영광 뒤에는 그에 필적하는 사회적 책임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권위와 책임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책임 없는 권위는 성립할 수 없다.
6. 왜경에게 무릎 꿇린 치욕
1800년대 후반 김흥락이 안동 일대에서 누린 권위는 대단했다. 1890년 안동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신임부사가 아전들과 짜고 읍민들을 착취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 해결 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김흥락의
중재였다.
김흥락은 유림사회와 민중들 모두에게서 신뢰를 받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흥락이 향청에 좌정하여 "무릇 민정은
순하면 따르고, 역하면 뿌리치는 법이다. 모든 폐정을 고치게 할 터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기다리라."고 한마디하니 운집해 있던
읍민들이 "그 나으리께서 우리를 속이겠는가? 그만 집으로 가세나!" 하고 모두 해산했다고 한다.
김흥락이 지닌 이러한 권위는 구한말 일제가 들어오면서 참담한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 굴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사들은 의병운동과 항일운동에 나섰다. 인구 비율로 볼 때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항일지사가 배출된 곳이 이곳 안동이다.
1896년 7월 22일 학봉 집안과 김흥락이 겪었던 굴욕은 이렇다.
김희락 의병 포대장이 지휘하는 100여 명의 의병이 안동시 북후면 웅천에서 일본군에 패전하였다. 김희락 대장은 간신히 도망하여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었던 학봉종택 안방 다락에 숨었으나 발각되어 결박되었다. 이에 화가 난 왜경은 김흥락과 김흥락의 동생 김승락, 김진의, 김익모 등 평소 의병활동을 했던 집안 어른 10명을 포박하여 종가 큰 마당에 꿇어앉히고, 살림을 전부 마당에 꺼내어 금비녀 등 쓸 만한 물건은 전부 가져가고 큰살림은 못쓰게 부스는 등 종가 집안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중략) 한참 동안 분탕질을 한 후 다른 분은 풀어놓고 김희락 대장과 같이 활동한 김진의 두 분을 안동경찰서(안동관찰부 兵隊)로 압송하였다. 김진의는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김희락 대장은 왜경의 총살 위협에도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내가 죽거든 자식들에게 보수(報 , 원수를 갚도록)를 가르쳐라!"고 지켜보던 가족들에게 소리치며 당당하게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두어 의병대장의 처절한 일생을 마감하였다.<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독립운동과 그 여맥(餘脈)>
의병대장 김희락은 김흥락과 사촌간이다. 왜병을 피해 사촌 형님 집이자 종가인 학봉 종택에 은신해 있다가
벌어진 일이다. 안동의 어른이었던 김흥락은 왜경에게 포박 당해 자기 집 마당에 무릎을 꿇는 수모를 겪었고, 사촌동생인 김희락은 총에 맞아
죽어야만 했다. 이는 개인과 집안으로 볼 때에는 수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존망을 염려한 영남의 명문 선비 집안에서 치러야만 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제, 즉 사회적 책임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안동 일대에서 절대적 권위를 지녔던 김흥락이 왜경에게 포박 당해
마당에서 무릎꿇어야 했던 사건은 안동의 유림들과 학봉 집안을 포함한 의성 김씨들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았다. 이 치욕은 안동 유림과 학봉
후손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흥락의 제자들 명단을 기록해 놓은 <보인계첩(輔仁 帖)>이라는 문건을
보면, 서산의 제자는 707명으로 나온다. 이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사람만 60명이다. 훈장 받은 숫자만 계산해서
60명이니 훈장을 받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제자들이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산의 제자 가운데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을 보면 석주 이상룡(상해 임시정부 국무령), 일송
김동삼(국민대표회의의장), 기암 이중업(파리장서 주도), 대개 이승희(만주 독립군), 백하 김대락(만주 독립군), 소창 김원식(만주
의정부)등이다.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거의 서산의 훈도를 받은 제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안동 일대에 거주하는 의성
김씨 천전문중(川前門中) 가운데서 훈장을 받은
이가 27명이다. 학봉의 후손만 떠져도 11명이다. 한 집안에서 27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것은 전국 최고가 아닌가 한다. 안동이 양반동네라는 말을 듣는 것은 그에 합당하는 사회적 책임을 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학봉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 김용환이 파락호로 위장한 이유
김흥락이 종가 마당에서 포박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를 현장에서 지켜본 손자가 있었다.
당시 나이 10세였던 학봉의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946)이다. 어린 김용환은 하늘처럼 보였던 70세의 조부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는 21세 때 이강년(李康秊)의병진에 가담,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치기로
작심한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 드라마틱했다. 그는 학봉종택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 재산인 전답 700두락,
18만평 (현 시가로 180억)을 모두 독립군 자금으로 보냈다. 그러다 보니 말년에는 종가 살림이 거의 거덜난 상태에 이르렀다. 당시 김용환은
안동 일대에서 유명한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소문났었다. 명문가 종손이 되어 가지고 집안 살림 망해 먹은 대표적인 사례로 학봉 종손 김용환이라는
이름 석자가 거명되었다. 그러나 이는 김용환의 철저한 위장이었다.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했던 것이다. 이 위장이
너무나 철저해서 집안 사람들도 종손인 김용환이 진짜 노름꾼인줄 알고 원망이 자자했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 만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낸 그의 비밀스런 행적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났다.
그는 1946년 임종에 이르러서도 끝내 그 비밀을 밝히지 않고 죽었지만, 근래에 그의 독립운동을 증거하는 자료들이 발견되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김후웅 여사는 1995년 아버지가 생전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자, 아버지에 대한 그간의
한 많은 소회를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제목의 서간문으로 남긴바 있다.
(전략)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 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꼬,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 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400년을 이어온 학봉 선생 고택의 구국활동)
학봉 종손이 파락호로 위장하고 그 많던 종가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넘기고, 그것도 모자라 하나뿐인 외동딸
장롱 살 돈마저 써버려 큰어머니가 쓰던 헌 농을 갖고 시집갔다는 이야기는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사연이다. 그 돈을
노름으로 탕진한 줄 알고 평생 아버지를 원망해온 딸의 감회가 어떠했겠는가. 너무나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끝내 발설하지 않은
김용환의 결의와 각오가 놀라울 뿐이다.
짐작컨대 그 결심은 그가 열 살 때 하늘같이 여긴 조부가 왜경에 수모를 당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양반동네 소동기> 라는 책의 저자인 윤학준이 근대 한국의 3대 파락호로 흥선 대원군 이하응과
1930년대 형평사(衡平社)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 그리고 학봉 종손인 김용환을 꼽았을 정도로 김용환의 삶은 극적이었다.
8. 천년불패지' 의 땅, 검재
이제 학봉종택의 지세가 어떤지 살펴볼 차례다. 대구에서 안동을 가다보면 서안동 인터체인지가 나오고, 서안동
인터체인지에서 안동 시내 쪽으로 들어가다 왼편 봉정사 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계마을이 나온다. 금계의 우리말 표현은 '검재'이다. 학봉종택은 이
검재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16세기의 기록인<영가지(永嘉誌)>를 보면 검재는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 곧
천년동안 패하지 않고 번성하는 땅으로 소개되어 있다. 풍수가에서 '삼원불패지지(三元不敗之地)', 즉 180년 동안 패하지 않는 땅이라는 표현은
가금 쓰지만, 천년불패지지라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을 만큼 이 말은 엄청난 표현이다.
학봉종택이 이러한 천년불패지지인 검재마을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일단 주목해야 한다.
'불패(不敗)'가 지칭하는 바를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전쟁, 기근, 전염병 같은 삼재(三災, 세 가지 재난)가 별로 없다는 말이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살기 좋은 동네이다. 검재의 풍수가 어떠하길래 옛사람들은 이처럼 찬탄을 금치 못하는가.
검재 지역의 산세가
주는 특징은 부드러움이다. 동양의 현자들은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을, 동(動)보다는 정(靜)을 중시했다. 부드러움과 정이 더 근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부인이 처음 검재마을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첫인상은 산세가 매우 부드럽다는 것이다. 100미터 내외의 야트막한 동산들이
주조를 이루는 산세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동산들이 풍기는 부드러움과 평화스러움을 잘 못 느끼겠지만, 나처럼 수많은 지역의 산세를
관찰하러 다니는 사람에게는 이 부분이 아주 인상적으로다가 온다.
멀리 높게 보이는 산인 학가산, 천등산, 조골산, 줄기가 내려와 기세가 순해지면서 상산,
주봉산을 형성했고, 상산과 주봉산이 다시 들판 쪽으로 내려오면서 더욱 순해져서 야트막한 동산을 이뤄놓은 것이다. 이곳 검재의 산세를 보니 몇 년
전 답사한 중국의 강서성 산세가 떠올랐다.
강서성은 중국 풍수의 양대 파벌인 형기파(形氣派)와 이기파(理氣派) 가운데
형기파의 본향이다. 사람의 관상을 보듯 산의 관상을 중시하는 것이 형기파이고, 산의 사주를 중시하는 파가 이기파이다. 형기파가 산의
관상을 볼 때 중점을 두는 부분은 전체적인 형태이다. 즉 산세가 원만하고 부드러운지 먼저 본다. 산이 높지 않고 둥글둥글 하고 바위산이 없을 때
부드럽다고 한다. 나는 당시 강서성의 산세들이 대부분 바위 절벽 없이 둥글둥글한 금체(金體)의 하고 있음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형기파가 태동할만한 산세로구나!
그런데 안동의 검재 산세가 이와 흡사하다. 오히려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강서성보다 산이 더
낮고 원만해서 보는 이에게 끊임없는 만족감과 안도감을 준다. 살기(殺氣)도 보이지 않는다. 살기가 없는 땅에서는 살생도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적게 일어난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검재는 문사가 살기에는 최적의 산세가 아닌가 싶다. 문사는 거친 부분을 다듬어 부드럽게
바꾸는 사람이다. 거칢에서 부드러움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바로 문명화 과정이기도 하다. 거친 사람이 다듬어져 부드러워질 때 그 강함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으로 깊이 들어간다. 그래서 선비는 외유내강을 전범으로 삼는 것이 아닌가. 검재의 산세는 외유내강의 문사를
길러내는데 최적의 산세를 갖추었다. 평소에는 지극한 예를 중시하는 선비의 고을이나, 굴욕은 참지 못하고 대항하는 검재 사람들의 기질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검재 산세의 장점 가운데 또 하나는 물이 원만하게 흐른다는 점이다. 냇물의 물살이 급하게 흐르면
우선 물 속의 산소 함유량이 적어서 생태학적으로 좋지 않고, 급류가 흐르면서 그 물살을 따라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때문에 기운이 모이지 않고
흩어진다. 그래서 직선으로 흐르는 물길보다는 S자나 갈지자로 흐르는 물을 풍수가에서 선호한다.
검재를 흐르는 개천들은 S자
형태로 원만하게 흐른다. 검재의 지형이 경사가 적은 평지이고 개천이 동네마다 흘러 수량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안동대 이효걸 교수의 지적에 의하면
검재의 냇물들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가뭄의 피해를 비교적 덜 받고, 마을에 저수지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낙동강
본류와 개활지(開豁地), 앞이 탁 트인 너른 땅)를 끼고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배수가 잘 되어 다른 지역에 비해 수해 피해가 크지 않다고 한다.
필요한 만큼의 물을 주산인 주봉산과 상산에서 일정하게 공급받으면서 물을 빨리 지나가게도, 머무르게도 하지 않는 것이 검재 마을의
수세(水勢)라는 것이다. 물이 적당한 동네 검재는 농사 짖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춘 셈이다.
9. 조선 후기의 상류층 저택
학봉종택은 조선 후기 상류주택의 모습이다.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풍뢰헌(風雷軒),
선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운장각(雲章閣)을 전부 합쳐 90여 칸 2천 평의 대지이다. 운장각에는 총 1만5천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그중 503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민간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화재 규모로는 국내 최대이다.
내 주의를 끈 유물은 학봉이
사용하던 안경이다. 이 안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안경이라고 한다. 학봉이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갔을 때 구입한 안경이라고 한다. 안경테는
거북이 껍질(龜甲)로 되오 있다.
현재 건물의 좌향은 간좌(艮坐)이다. 간좌는 서남향인데, 영남 지역의 명문부가(名門富家)에서
간좌집이 많이 발견된다. 집 뒤의 내룡은 산이 아니라 작은 동산에 가까울 정도로 아담하고 부드럽다. 태조산(太祖山)인 천등산에서 20리를 굽이쳐
내려온 맥이라고 한다. 학봉 생존 당시에 간좌인 이 터에 집을 지었으나,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되고 습기가 많아서 1762년에 현 위치에서
100미터 가량 떨어진 소계서당(邵溪書堂) 자리에 새로 해좌(亥坐)의 종택을 지어 1960년대까지 살았다. 그러다가 1964년에 원래의 간좌
자리로 다시 건물을 뜯어 이사온 것이다. 습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집터를 2미터 정도 흙으로 돋운 다음에 이사를 왔음은
물론이다.
간좌인 이 집의 특징은 앞 안산(案山)이 둥글둥글한 금체 형태의 작은 동산들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 봉우리들은
노적봉으로 노적봉은 쌀과 재산으로 간주한다. 소계서당이 있는 해좌의 구 종택과 간좌의 현 종택이 풍수상에서 지니는 차이는
무엇인가.
해좌 터는 멀리 조산(朝山)으로 뚜렸한 모습의 문필봉이 좋게 보인다. 문필봉은 학자가 살기 좋은
집터이다. 반면에 수구(水口)가 벌러져 있고, 물이 집터를 감아 돌지 않고 쭉 뻗어 나가는 형세이다. 즉 해좌 터는 문필봉이 장점인 반면,
수구와 물의 흐름은 약점이다. 현재 종택인 간좌는 문필봉은 없는 대신 물 흐름이 집을 감싸고 흘러서 좋고, 안대도 노적봉이라 재물이 모이는
터라고 볼 수 있다. 각기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는 것이다. 어느 터를 택할 것인지는 종택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학봉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 대에 이르러 독립운동 자금을 대느라 이 집의 재산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그런데다가 딸만 하나 있었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했다. 돈도 떨어진데다가 아들도 없다는 것은 수백 년 간 명맥을 이어온 학봉
종가 역사에서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학봉 종가를 보종(保宗)할 것인가? 먼저 대를 잇기 위해서는 양자를 들이는 문제가
시급했다. 학봉 집안은 워낙 손이 귀해서 13대인 김용환도 양자로 들어온 종손이다. 1945년 정월, 임천서원에서 전체 문중 회의를 소집하여
논의한 결과 검재에서 100리 정도 떨어진 지례라는 곳에 살고 있는 김시인(金時寅)이 여러 가지 자질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그를 양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 결정에는 종손인 김용환의 생각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문제는 김시인의 생가에서 아들을 양자로 보내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살림도 완전히 거덜난 상태에서 종손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려면 이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가 쪽에서는 완강하게
양자 청을 거절했던 것이다.
10. 양자로 종손 잇기 작전
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전체 문중사람들이 100리나 떨어진 지례에 가서 간청했다. 아예 김시인의
생가 인근 마을에 집을 한 채 얻어놓고, 10명씩 조를 짜가지고 생가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대기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설득과
간청을 반복했다. 마치 사극에 나오는 석고대죄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그 설득 기간이 자그마치 일곱 달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끈질긴
설득이었는지 짐작 간다. 문중 사람들은 100라니 떨어진 곳을 걸어서, 그리고 추운 겨울에도 마당에 멍석 깔아놓고 하루 종일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한 것이다. 그들은 보종을 위해서 당연히 치러야할 대가로 여겼다.
이렇게 해서 들어온 종손이 14대 종손인 김시인이다. 대개 양자의 나이는 10세 전후 또는
총각때 들어오는 것이 상례인데, 김시인은 29살이라는 많은 나이에 양자로 왔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는 이미 결혼해서 아들을 두 명이나 둔
상태였던 것이다. 이처럼 처자식까지 데리고 온 양자를 일컬어 안동 지역에서는 '둥지리'양자라고 부른다. 둥지를 통째로 옮겨 왔다는
뜻이다.
현 종손인 김시인의 나이 올해 86세, 그가 학봉 종택에 양자로 들어온 해는 1945년 10월이다. 이때 김시인이
양자로 와보니까 집에는 숟가락 하나 변변한 것이 없을 정도로 살림이 궁색했다고 한다. 김시인은 그 상태에서 집안을 오늘날처럼 다시 일으킨
장본인이다. 80대 중반의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꼿꼿한 기세를 지니고 있다. 쏘아보는 안광이 상대를 압도하는 압인지상(壓人之像)의 기풍을 지녔다.
그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종손으로 있으면서 퇴색한 종가를 사람이 모여드는 문중의 중심지로 복원해 놓았다.
종가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시인의 부인이자 14대 종부인 조필남(趙畢男)
할머니다. 타협을 모르는 칼 같은 남인이라고 해서 '검남(劍南)'으로 알려진 영양 주실마을의 한양 조씨 집안이 친정이다. 명문가의 딸로서 가사
외우기를 즐겨하고 문장력이 뛰어나 모모한 집안에 보내는 사돈지를 써달라는 부탁이 줄을 이었다. 국량이 크고 성품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지혜가
뛰어난 종부의 전형이다.
조필남 할머니는 종가 살림이 어려워도 찾아오는 문중 사람들 누구나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려고 애썼다. 찾아오는 손님을 절대로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 줄 것이 없으면 하다 못해 호박 한 덩어리라도 손에 쥐어 보내곤
했다. 종부를 접해본 지손(支孫)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종부의 그 따듯한 인간미에 감동해서 종가를 보존하는 보종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조씨 할머니가 작고하던 지난 1993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대구 시내의 꽃가게에 꽃들이 모두 바닥났다.
300만 인구가 사는 대도시에 꽃가게가 한 두 군데도 아니고, 더군다나 그때가 특별한 기념일도 아닌데 시내 꽃가게에 진열된 꽃들이 다 떨어진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대구 모 신문사 기자가 그 원인을 조사했다. 소문은 어떤 여자가 죽어서 그 문상 조화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대체 어떤 여자가 죽었길래 그런가 하고 조사해보니 안동 학봉 종가의 종부였다는 얘기다. 조씨 할머니의 죽음이 가까운 안동은 물론이고
멀리 대구의 꽃가게에까지 영향을 미친 셈이다. 학봉가의 종부인 조씨 할머니의 덕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으로 깊은 인상을 받은 대구<매일신문>기자가 신문에 '종부(宗婦)'시리즈를 기획 연재했다고 한다.
그동안 종가라고 하면 으레 종손에게만 초점을 두었는데, 그 뒤에서 묵묵히 종가를 지탱하고 있는 종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조씨 할머니의
사례를 통해 깨달았다는 것이다.
11. 존중받는 종부의 권위
실제로 학봉 종가에서는 종부의 권위를 존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매년 정월 초하룻날 종가
사당에 차례를 지낸 후 이어지는 신년 세배이다. 세배는 종가 안채 마루에서 한다. 학봉의 후손들 가운데 나이든 연장자 100여 명이 종가에
찾아와 종부에게 세배를 드린다. 대게 나이들이 60∼70대의 갓 쓴 노인들이고, 그 중에는 종부보다 20년 연상인 노인들도 있는데 나이에
상관없이 정초에는 종부에게 세배를 드린다. 물론 종부도 같이 절을 하는 맞세배의 형식을 취하지만, 100여 명의 갓을 쓴 노인들이 대청마루에 줄
맞추어 앉아서 종부 한 사람만을 상대로 큰절을 하는 풍습이 학봉종택에서는 대대로 내려온다. 그만큼 종부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징표이다.
문중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에도 종부인 조씨 할머니의 영향력이 컸다. 문중 남자들이 모여
문회(門會)를 할 때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바깥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종부가 몇몇 사람을 불러내어 이런 식으로 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개진한다. 종부의 의견이 논의 과정에 전달되면 종부의 의견대로 결정되는 수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조씨 할머니의 3남인
김종성(51)씨가 해주었다.
14대 종손인 김시인씨와 조씨 부인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차종손인 장남은
김종길(61)씨이다. 삼보컴퓨터 사장, 나래이동통신 사장을 거쳐 초고속 인터넷 기업인 두루넷 사장을 지냈으며, 현재 삼보컴퓨터 부회장으로 있다.
차남 김종필(59) 씨는 감사원 부이사관으로 근무하고 있고, 3남인 김종성(51)씨는 LG전자 상무로 있다. 큰딸은 대구 장씨 집안으로
출가했고, 둘째딸은 원주 변씨 종가로 출가하여 교편을 잡고 있고, 셋째딸은 영양 남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종택 사랑채에서 차종손인 김종길씨를 만났다. 몇 달 전 TV 프로인 '성공시대'에도 출연한바
있고, 동탑산업훈장과 올해의 정보통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신문과 잡지에 소개된 바 있는 유면 인사이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선이 굵고
시원시원한 성품이라서 사람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친화력이 느껴졌다. 주변 소문을 들어보니 김종길 씨는 우리 나라 기업 CEO 중에서 최고의
CEO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친화력과 리더십을 갖추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 전통을 중시하는 학봉 종가의 차종손으로서
첨단 인터넷 사업을 주로 하셨는데, 전통과 첨단과의 만남에서 오는 갈등은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TV프로에서 저의
캐릭터를 '갓을 쓴 인터넷 사업가'라고 표현하더군요. 갓과 인터넷이 만나다보니 장단점이 있습니다. 장점은 제가 직원들과 무난한 인간관계를 무난히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점입니다. 종가에서 종손으로 성장하다보니까 항상 집안의 여러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종손으로서 한편으로는 굉장한 우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학봉 집안이라는 공동체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늘상 의식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혼자만을 생각할 수 없는 환경이었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직장생활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훈련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반면 갈등이 되었던 점은 인터넷이라는 것이 외래 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단은 우리 전통을 확고히 알고 주체의식을 가지고 외래 문물을 받아 들여야 하는데, 전혀 걸러내지 않은채 젊은 사람들이 무조건
서양문화를 추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 부분에서 내면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12. 학봉 후손들의 종손 키우기
- 집안 사람들 이야기가 보종계(保宗契)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다녔다는데, 보종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대학에 입학할 즈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 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알게된 학봉 후손들이
종손을 도와야 한다고 나섰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종손을 대학에 가게끔 도와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계를 조직하여 십시일반으로 돈을 조금씩
걷어서 제 등록금과 학비를 대줬습니다. 대략 300∼400가구가 돈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보종계입니다.
저희 집안은 보종의식이 강해서 지손들이 종갓집 농사도 대신 지어주고, 겨울철이 되면 땔감도 해다
주고, 명절과 제사 때에는 종갓집 마당 잔디도 베어주고, 김장 때면 채소까지 그냥 갖다 줍니다. 종가에 대한 보호의식이 특별합니다.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면 일제 때 조부(13대 김용환)께서 종가를 세 번이나 다른 사람에게 팔았는데, 지손들이 돈을 걷어 그때마다 다시
구입해주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도 혹시 문중 사람들이 종가에 잠깐 들를 때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아무리 바빠도 제가 직접 커피를
탑니다. 천 분의 일이라도 갚아야죠."
- 부인인 이점숙 여사는 혹시 종부 역할을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습니까?
"집사람은 퇴계 종가의 종녀입니다. 집안 어른들끼리 혼사를 정해서 당사자인 저희는 얼굴은커녕 사진도 못 보고 결혼했습니다. 처녀 때부터 종가
분위기에 충분히 익숙해진 사람이지요. 저희 부부는 서울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한 달에 보름은 안동에 내려옵니다. 손님들 오면 밥상 차리고
접대해야 합니다. 집사람도 서울에 있을 때에는 사장 부인이지만, 안동에 내려오면 손님들 밥상 들고 직접 날라야 합니다. 하루 평균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대략 50명은 될 겁니다. 밥상을 다 못 차려 드릴 때에는 차라도 한잔 대접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퇴계의 종녀인 이점숙 여사는 퇴계가 학봉에게 전해준 '병명'을 5년 동안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12폭 병풍으로 만들었다.
학봉종택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는 수를 놓아 만든 이 병풍을 사용한다.
차종손인 김종길씨는 딸만 넷이고 아들이 없다. 그래서
역시 양자를 들인 상태다. 바로 LG에 있는 동생 김종성 씨의 아들이다. 장남이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들일 때에는 차남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는
것이 관례이다. 이 관례대로라면 감사원에 있는 차남인 김종필의 아들이 양자로 가야하고, 3남인 김종성의 아들이 차남인 김종필의 양자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절차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3남인 김종성의 아들이 곧바로 큰형님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김종성의 아들이 양자로 들어가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차남은 아들이
하나뿐이고 3남인 김종성은 아들이 둘이므로 한 명을 보내도 한 명은 데리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 둘째 이유는 아버지(14대 김시인)가
양자로 오기 전에 장남과 차남은 이미 지례에서 출생한 상태였고, 검재 종택에 양자로 온 뒤에 낳은 아들이 김종성 씨라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셋째 아들만 검재에 온 이후 출생한 순수 '검재 산(産)'이니까, 김종성씨의 아들이 양자로 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문중 어른들의 판단이
작용했던 것 같다.
13. 집안 행사 때면 평균 1천 명 이상 참여
다섯 살 때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간 김종성 씨의 장남이 김형호(22)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서울의 생부 집에서 같이 살면서 양부 집을 왔다갔다했지만, 대학은 안동에 내려와 안동대학 국학부에 다니고 있다. 일종의 종손 수업을 위해서
서울이 아닌 안동에서 일부러 대학을 다니고 있는 것이다. 종가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알 수 있다.
나는 학봉 종택에 관한 모든 자료를 3남인 김종성 씨에게서 구했다. 근 s집안의 역사와 문중 대소사에 관한 일들을 빠짐없이
꿰뚫고있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면 척척이다. 집안의 전통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다는 증거이다. 회사 상무가 아니라 향토사학자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관상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진지하고 신중한 학자풍이다.
- 큰아들을 양자로 보냈는데 혹시 섭섭한 마음은 없습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안 친척들은 저를 보고 '대원군'이라고 농담도 합니다. 제가 검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종가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잇습니다."
- 이 집에 찾아오는 손님의 규모는 어느 정도나 됩니까?
"영남일대 종가에서 저희 집같이 손님을
많이 치르는 집도 드물 겁니다. 100년 전 11대 종손인 서산 선생의 장례식 때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조문객이 4천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
4천명을 저희 집을 비롯한 검재의 학봉 후손들 집에 분산해서 전부 숙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때 조문객이 갖고 온 대구포가 얼마나 많은지
고방(庫房)에 하나 가득 찼다고 하니까요. 1987년 운장각 준공식 때, 그리고 1995년 서산 선생과 조부의 독립훈장 추서를 사당에
고유(告由, 신고)할 때에도 손님이 1천 명 정도 왔습니다. 1999년 11월 서산 선생 서거 100주년 추모회와 2000년 11월 추모강연회
때에도 1천 여 명이 모였고요.
저희 집에서 행사를 할 때면 평균 1천 명 이상 참석합니다. 지난 퇴계 탄신 500주년
학술회의에 참석한 외국 손님들 몇 분도 저희 집에 묵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인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사랑채에 과객들이 평균 10 ∼
15명은 항상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무전취식이었지만, 그렇다고 대접을 함부로 할 수 없었죠. 70년대 도로가 꿇리면서
과객들이 준 것 같습니다. 도로가 생기면서 전통문화가 바뀐 것이죠."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이 집안이 유난히
초·중·고·교장을 많이 배출했다는 점이다. 교장만 무려 30여 명이다.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전환기에 선비 집안 후손들이 진출할 수
있는 가장 원만한 직업이 학교 선생님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학봉종가는 과거완료형의 종가가 아니라 현재에도 끊임없이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진행형 종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여빈객을 수행하는 명문가로 400년 동안 변함 없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명가는 인물을 낳고 인물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가 보다. 끝.
'자료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컴퓨터 사양 (0) | 2006.12.11 |
---|---|
논술 단골 '장자(莊子)' (0) | 2006.11.30 |
대중가요와 한시수업 (0) | 2006.11.06 |
효의 변천-송두리째 무너지는 전통윤리3 (0) | 2006.10.28 |
병법 36계 (0) | 2006.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