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
위장귀순설은 정보부장 金炯旭의 조작. 제3국으로 도피하려고 탈출. 북한노동당 비밀강연: 변절자의 말로. 趙甲濟 |
그를 체포한 이대용(李大鎔)공사, 그를 조사했던 홍필용(洪弼用)국장등 당시 정보부 간부들이 털어놓은 20년만의 진실―『그것은 김형욱(金炯旭)의 조작이었다』
<1989년 3월 월간조선>
이대용(李大鎔)씨의 말 한 마디에서…
위장 귀순하여 여교수와 결혼, 잘 먹고 잘 살다가 느닷없이 가발을 쓰고 콧수염을 붙인 뒤 위조여권을 갖고 국외로 탈출했으나 중앙정보부의 활약에 의해 사이공 공항에서 붙들려 와 사형집행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전 북한중앙통신사 부사장 李穗根. 죽을 때의 나이가 만 45세였으나, 그 짧은 생애에 일본제국군대 지원, 북한 노동당 입당, 북한 탈출, 남한 탈출 등 세 번의 체제변화를 겪었던 이 「언론인」에 대해 기자가 한 번 제대로 기사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언제인지 묵은 탁상일기를 뒤져보았다.
1986년 1월8일 오후에 기자는 서울 여의도에 사무실이 있던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 이대용(李大鎔)씨를 찾아갔었다. 李씨는 1969년 1월31일 오전 사이공의 탄손누트공항에서 이수근(李穗根)을 비행기로부터 끌어내렸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의 공사직함(육군 준장)을 가진 중앙정보부 월남책임자였었다. 이대용(李大鎔)씨는 이수근(李穗根)을 체포한 사람으로는 별로 유명하지 않다.
李공사는 1975년 4월에 사이공이 함락될 때 탈출하지 못하고 2명의 대사관 직원과 함께 억류돼 감옥생활을 했다.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과 이스라엘 상인 아이젠버그의 중계에 의한 비밀접촉 끝에 李공사일행은 1980년 4월에 풀려나 귀국하였었다. 억류 5년간 베트남 당국과 북한측의 집요한 회유를 받고도 사상적 변절을 거부했다고 하여 반공정신의 상징처럼 돼 있는 그는 「사이공 억류기」란 책도 냈고, 이 책은 텔리비전의 미니시리즈로 극화되었다. 육사 7기 출신인 그는 6·25 전쟁 때는 6사단의 중대장으로서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변인 초산에 맨 처음 당도한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월남 패망 때는 미군 헬리콥터에 타고 철수할 수 있었지만 대사가 먼저 가버린 상황에서 남아 있는 한국교민들과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일부러 헬기를 타지 않았던 사람이다. 「위장간첩 이수근(李穗根)」은 해외여행자 소양교육장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으니 두 李씨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한국인의 반공교육에 상당히 기여를 한 셈이다. 3년 전 그 날에 기자가 이대용(李大鎔) 이사장을 찾은 것은 이수근(李穗根)의 체포작전에 미국 CIA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때 기자는 월간조선 그해 2월 호에 「한국내 미 CIA」란 제목으로 실린 기사의 취재를 하고 있었다. 李이사장은 두툼한 메모 책을 펴놓고 당시의 상황을 시간별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정보부와 주월 한국대사관 사이를 오고간 수십 통의 전문 내용, 이수근(李穗根)과의 대화내용 등등이 적힌 메모책을 덮으면서 李회장은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 한마디를 던졌다.
『이수근(李穗根)이가 간첩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이지요』
『언젠가는 제가 진실을 밝힐 생각입니다. 그는 간첩이 아닙니다』
李회장은 『여기에 다 적혀 있다』는 듯 메모 책을 가리켰다. 어리둥절해진 기자는 궁금증을 나타내며 캐묻고 들어갔다. 李회장은『지금은 밝힐 단계가 아니다』면서도 몇 마디 참고가 될만한 얘기를, 내키지 않는 듯, 그러나 자신만의 비밀로 안고 있기에는 좀 안타까운 듯, 뱉어내었다. 퍼뜩 기자의 뇌리에 스친 이수근(李穗根)의 이미지는 좀 우스꽝스럽기도 했던 위장간첩이 아니라 최인훈(崔仁勳)의 영원한 베스트셀러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李明俊)이었다.
사형 때 『김일성 만세!』 안 불러
李씨가 기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은 그런 말을 들어도 기자가 기사화 할 수 없으리라는 계산이 있었을지 모른다. 기자도 그 말을 기사화 하려는 취재작업을 벌이지 않았다. 진실을 알아도 어차피 못 쓸 기사인데 취재를 해보았자 무얼 하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이수근(李穗根)사건을 기사화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 당시의 언론상황이었던 것이다. 李사장을 만난 지 석 달쯤 되는 날에 기자는 또 우연하게 이수근(李穗根)과 부딪쳤다.
한국의 사형집행 실상에 대해 취재하고 있던 기자는 화양동 성당의 사무장 고중렬(高重烈)씨를 만났다. 高씨는 서울구치소에서 20여 년간 사형수 교화담당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수백 명의 사형집행에 참여한 이다. 퇴직 뒤에는 「서울구치소」라는 책을 쓰기도 했었다. 高씨가 먼저 이수근(李穗根) 이야기를 꺼냈다. 이수근(李穗根)은 사형집행 때 많은 간첩들이 그러했듯 『김일성 만세!』를 부르지도, 신문이 보도했듯『자유대한 국민들을 배신하여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신부님이 천주교 식의 영세를 받겠느냐고 했더니 이를 거절했어요. 신부님이 안타까와서 눈물을 쏟던 기억이 납니다. 이수근(李穗根)이는 신부님의 권유하는 말을 막고 자기 말을 계속하려고 했는데 집행관이 도중에 중단시키고 집행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유언은 구체적으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전체적인 뜻이「나는 북도 남도 싫어 중립국에 가서 살려고 했다. 남북 양 체제에서 생활한 경험을 살려 한반도 통일방안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흐름이었습니다』
이수근(李穗根)이 남겼다는 마지막 말은 그가 이대용(李大鎔) 공사에게 붙들린 직후 자포자기 상태에서 쏟아놓았다는 말과 거의 일치했다. 高씨를 만난 지 두 달쯤 지나서 기자는 또 우연히 이수근(李穗根)과 만났다.
김형욱(金炯旭) 아래에서 정보부 국장을 지낸 金모씨는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이수근(李穗根)을 거론했던 것이다. 『내가 李를 맡아 관리했던 적이 있었지요. 사이공에서 붙들려 와서 조사를 받는 자리에 내가 갔더니, 그는 나를 붙들고 펑펑 울면서 감찰실장 방(方)모씨 욕을 하더군요. 方실장이 하도 그를 괴롭혀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는 겁니다. 수시로 그를 불러내, 권총을 들이대고, 「너 간첩이지」하면서 위협을 했으니…』 기자는 지난 3년간 이수근(李穗根)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자가 본격적으로 이 소재를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한 달쯤 전부터였다. 이제는 「이수근(李穗根)의 진실」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기사는 한국민주화의 한 산물인 셈이다. 이수근(李穗根)의 삶과 죽음이 분단상황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집행간여 검사의 증언
기자가 첫 취재대상으로 잡은 이종효(李宗孝)신부(서교동 성당)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사형집행의 집례를 본 경험이 짧은 때인데, 그를 영세 받게 하지 못해서 안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에 대한 선입감 때문에, 당연히 「김일성 만세!」를 외치고 죽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유언을 했으나 태도는 태연자약했어요. 참 똑똑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이수근(李穗根)이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 당한 것은 1969년 7월2일 오전 11시쯤이었다. 당시의 신문들은 「서울지검 김병하(金炳河) 검사가 이름, 생년월일 등을 물어 사실확인을 했고 李가 『따뜻한 환대를 저버리고 탈출하려 한 데 대해서는 온 국민에게 미안하다』는 최후진술을 했다」고 보도하였다.
지금은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는 김병하(金炳河)씨는 『그때 신문에 보도된 李씨의 유언은 모두가 엉터리다. 오전에 이미 사형을 집행한 뒤 바깥으로 나오니 이미 신문에 추측기사가 실려 있더라』고 했다. 金변호사는 사형 집행장에서 신문하는 과정에서 이수근(李穗根)과 이런 문답을 나누었다고 기억했다.
김병하(金炳河) 검사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털어놓아라. 그러면 집행을 연기할 수도 있다.
이수근(李穗根) : 없다.
김(金)검사 : 왜 대한민국에서 도망갔는가?
이수근(李穗根) : 나는 북쪽과 남쪽 체제를 다 경험하여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중립국에 가서 통일방안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였다.
金검사 : 더 할말이 있는가?
이수근(李穗根) : …
(金변호사는 『그는 가족에 대한 말을 남기지 않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담담했었다』면서 『그가 남한에서 감시를 당하는 등 자유를 속박 당한데 불만이 많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정보부, 李의 행방 이틀간 몰라
이수근(李穗根)이 아내 이강월(李江月)씨(당시 36세)에게는 알리지 않고 북에 있는 본처의 이질인 배경옥(裵慶玉)씨(당시 29세)와 함께 서울 성북구 삼양동 233의 3번지에 있던 자기 집을 나와 위조여권의 주인 오제녕(吳濟寧)씨 행세를 하면서 행선지를 태국으로 하여 김포 발 홍콩 행 케세이퍼시픽 항공사(CPA)의 여객기에 몸을 실은 것은 1969년 1월27일 오후 5시30분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다음날 밤에야 비로소 이수근(李穗根)이 자취를 감춘 사실을 알아냈다. 李穗根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감찰실 직원이 27일에 실시된 부내 승진시험에 참여하느라고 이틀간이나 李의 행방을 놓쳐버렸던 것이다.
정보부는 이수근(李穗根)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던, 李穗根의 누이 이신성(李信星)씨(당시 사망)의 아들 김세준(金世埈)씨(당시 22세·연세대 재학)를 28일 밤에 연행하여 李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金씨는 삼촌 李穗根을 김포공항까지 전송하여 李가 간 곳을 알고 있었으나 다음날(29일)까지 행선지를 대지 않아 정보부에서는 李穗根이 국내에 있는지 해외로 나갔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공의 대사관에서 이대용(李大鎔)씨가 본부(정보부)로부터 긴급 전문을 받은 것은 29일 새벽이었다. 그 내용은 이수근(李穗根)과 처조카 배경옥(裵慶玉)이 해외로 탈출했으니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李공사는 직원들을 탄손누트 공항과 여관 촌, 이민국으로 보냈다.
29일 오전 8시에 또 한 통의 전문이 날아왔다. 李穗根이 이세준이란 가명으로 월남에 잠입한 것 같으니 체포하라는 지시였다. 李공사 팀이 월남 이민국의 입국자 명단을 조사해보니 이세준은 28일 오전 9시15분에 CPA편으로 사이공에 도착, 17명의 기술자들과 함께 다낭으로 갔음이 밝혀졌다. 이세준을 잡아와서 조사해보니 그는 李穗根이 아니라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청룡부대 중대장까지 지낸 사람으로 확인됐다. 29일 오후에 비로소 이수근(李穗根)이 오제녕(吳濟寧) 이름으로 된 위조여권을 갖고 출국했다는 전문이 李공사 앞으로 날아왔다. 정보부는 만 2일이 지나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었다.
이수근(李穗根)과 배(裵)씨는 27일 홍콩에 도착, 이틀 밤을 호텔에서 보낸 뒤 29일에 목적지를 캄보디아로 변경, 프놈펜행 CPA기를 타려고 그날 오후에 홍콩 공항에 나타났다. 공항을 지키고 있던 한국영사관 직원들이 李를 발견, 격투를 벌였다. 李의 가짜 콧수염이 떨어져나가고 가발도 벗겨졌다. 홍콩경찰은 영사관 직원들과 李 그리고 裵씨를 경찰서로 연행했다. 영사관 직원들은 외교관 신분이었으므로 즉각 풀려났다.
김형욱(金炯旭) 정보부장은 이병두(李秉斗)차장을 급히 홍콩으로 보냈다. 미CIA 한국지부장 라자스키씨에게는 협조를 요청했다. 홍콩경찰은 1월31일 아침에 홍콩을 출발, 프놈펜으로 가는 CPA기에 이수근(李穗根)과 裵씨를 태워 출국시켰다. 이 여객기는 사이공을 경유하는 것이었다. 영국정보기관은 미국 CIA의 부탁을 받고 李를 일부러 사이공 경유 항공편에 태움으로써 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사이공 공항에서 붙들 수 있도록 했다는 얘기가 있다.
비행기에서 끌어내린 李穗根
미CIA는 이수근(李穗根)의 홍콩출발을 김형욱(金炯旭) 부장에게 직접 통보하였다. 金부장은 홍콩에 나가 있는 이병두(李秉斗)차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李차장은 李가 아직 경찰서 안에 있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金부장은 욕설을 퍼부은 뒤, 사이공의 이대용(李大鎔)공사에게 긴급지시를 내렸다. 그때는 이미 李가 탄 CPA기가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한 2분 뒤인 31일 오전 10시17분이었다. 대사관에서 공항까지 가는 데는 교통체증으로 1시간쯤 걸린다. 李공사는 보좌관을 티우 대통령에게 보내 비행기의 이륙을 지체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李공사는 미국에서, 티우 대통령이 군 장교시절, 그와 함께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李씨가 1963년에 무관으로 부임해 온 이래 절친한 친구가 됐는데, 대통령 관저도 뒷문으로 무상출입 할 정도였다. 李씨는 차를 몰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티우 대통령의 지시로 비행기는 아직 이륙하지 않고 있었다. 비행기로 뛰어올라갔다. 부하인 이택근씨만을 데리고 갔다. 李공사는 단박에 이수근(李穗根)을 알아봤다고 한다. 李穗根은 앞자리의 창 쪽에, 앉아 있었다.
李공사는 스튜어디스에게 신분을 밝히고 승객 명단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 스튜어디스는 미스 장이란 예쁜 한국 아가씨였다. 승객명단 맨 끝에 오제녕(吳濟寧)이라고 볼펜으로 써넣은 이름을 확인했다. 2대 2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끌어낼까 궁리하고 있는데 배경옥(裵慶玉)씨가 다가왔다.
『대사관에서 오셨습니까』
『너 배경옥이지!』
배(裵)씨는 기가 푹 죽은 표정으로 여권을 내밀었다. 이택근씨에게 裵씨를 꼭 붙들고 있게 했다. 李공사는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수근(李穗根)에게 다가가 『이 선생이지요』라고 했다. 갑자기 그는 『야 이놈아! 난 죽을 각오가 돼 있어!』라면서 李공사의 정갱이를 걷어찼다. 태권도 2단인 李공사는 위에서 그의 어깨를 갈겼다. 기장이 달려와 『왜 이러느냐』고 물었다. 李공사는 신분을 밝히고 티우 대통령의 특명이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기장은 물러났다.
그 사이 한국 대사관 직원 대여섯 명이 달려와 합세, 李穗根을 무사히 끌어낼 수 있었다. 수갑을 채워 대사관으로 데려가는 차 중에서 『야, 우리 부장 좋아하시겠구만』 『야, 이 선생은 훈장 타게 됐구먼』이라고 빈정대기도 했다고 한다.
이상의 경위는 이대용(李大鎔)씨가 3년 전 기자에게 털어놓은 내용이었다. 기자는 지난 1월 하순에 李大鎔 생명보험협회 회장을 다시 찾아갔다. 李공사는 69년 1월 31일 오전에 李, 배(裵)씨를 붙들어 대사관으로 데리고 와 그날 밤 11시55분에 C-54 한국공군기 편으로 김포로 보낼 때까지 12시간쯤 같이 있었다. 李공사가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이 아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이때의 관찰 때문이다. 李공사는 3년 전에 보여주었던 그 메모 책을 다시 뒤적이면서 기억을 되살렸다. 『모든 게 분단의 비극이지요. 이수근(李穗根)은 고향이 황해도 서흥군인데 저는 금천으로서 가까운 곳이지요. 그날 이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북도 남도 싫었다』
李공사 팀은 대사관 2층에 李와 배(裵)씨를 꽁꽁 묶어 의자에 앉혀 두었다. 도리우찌 모자, 안경, 현금(미화), 수첩 등 50여 점의 소지품을 압수했다. 이수근(李穗根)은 엉엉 울면서 하소연하듯 그 동안의 불만을 털어놓았다. 오후에 정보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李穗根에게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먹여 재워두라는 것이었다. 그는 별 저항 없이 약을 먹고 의자에 앉은 채로 잠에 떨어졌다고 한다. 李穗根은 마침 그때 사이공을 방문한 「정보부의 모 간부」와 이야기를 오래했는데 李공사는 곁에서 주로 듣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李공사가 메모해둔 대화 내용의 중요부분은 이러한 것이었다.
문 : 왜 이런 짓을 했나?
답 : 북쪽이 싫어 내려왔는데 남쪽에서도 자유가 없더군요. 방(方)○○, 그 ○○가 나를 일일이 감시하고 수시로 불러서 북쪽과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면서 때리고, 내 발을 향해 권총을 쏴 위협을 하지 않나….
울분을 술로 달랬는데, 다음날 아침에 속이 아파 물을 달라고 하면 아내도 냉대하고….
문 : 그래도 남한이 북쪽보다 낫지 않나?
답 : 그렇지요. 북쪽보다야 백 번 낫지요.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북한이 바로 지옥이지요. 그래서 탈출했는데, 남쪽도 틀렸어요. 자유도 없고, 독재이고 해서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가서 살려고 했어요. 남쪽, 북쪽을 다 경험한 것을 책으로 쓰면 한 40만에서 1백만 달러는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수근(李穗根)은 『방○○에게 괴로움을 당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方씨는 당시 정보부 감찰실장이었다. 方씨는 육사8기 출신의 헌병장교였는데 모종의 사건에 연루돼 면직되었다가 5·16쿠테타 뒤에 정보부에 들어갔었다. 김형욱(金炯旭)은 방(方)씨를 감찰실장으로 승진시키고 악역을 주로 맡겼다고 한다. 方씨는 장기영(張基榮)당시 부총리의 집무실에 침입, 캐비넷을 뒤지고 정보부 전·현직 간부들의 비행을 조사한다면서 여러 가지 무리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 간 방(方)씨에 대해서 이대용(李大鎔)씨는 『그런 사람에게 이수근(李穗根)의 관리를 맡긴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方씨가 李穗根을 달아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고 했다.
김형욱(金炯旭)의 실토
이대용(李大鎔)씨는 『방(方)씨가 정보부에서 밀려난 뒤 사이공에서 음식점을 차렸는데, 「누가 날 죽이려 한다」면서 불안 해 하는 등 강박심리를 보이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당시의 정보부 국장 金모씨도 『方씨는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이였다』고 했다. 그는 또『이수근(李穗根)이 간첩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 정보부 안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고 덧붙였다. 이대용(李大鎔)회장은 더욱 결정적인 증언을 했다.
『李穗根사건 뒤 티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제가 따라 왔지요. 그때 김형욱(金炯旭)부장이 자기 사무실로 저를 불러 당부를 하더군요. 「이수근(李穗根)이가 2중 간첩이라고 발표했는데 그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은 李공사가 더 잘 알지 않소. 그렇다고 李穗根이를 살려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나와 당신을 포함하여 몇 사람밖에 안 되니 절대로 보안에 붙여야 합니다」
신문에 보니 이수근(李穗根)은 한 2년쯤 징역을 살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李회장은 메모 책을 다시 뒤적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李穗根의 소지품 중에는 영한사전, 한영사전, 기초영문법, 중국어 4주간이 있습니다. 북한으로 넘어가려 했다면 이게 무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캄보디아에서 생활하다가 스위스 같은 유럽의 중립국으로 가서 살려고 했다고 하더군요. 사전류는 그곳에 적응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죠』
이대용(李大鎔)공사가 탄손누트 공항에서 李穗根을 붙들지 못했다면 김형욱(金炯旭) 정보부장은 틀림없이 면직되었을 것이다. 李穗根이 중립국으로 탈출, 남한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박정희(朴正熙)정권의 독재성을 폭로했다면, 朴대통령은 굉장히 화를 냈을 것이고 李의 탈출을 모르고 있었던 정보부의 책임자는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金炯旭부장은 李穗根을 수중에 넣자 이 실패담을 성공담으로 둔갑시킨다. 중앙정보부는 李穗根을 체포한지 13일 뒤인 1969년 2월13일에 이 사실을 국내 언론에 공개했다. 이 날의 발표전문은 이러했다.
중앙정보부 발표 전문
(1) 1967년 3월22일 판문점을 통하여 자유대한으로 월남한 북괴 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李穗根)(45)은 그가 북괴 공산사회에서 급진적으로 출세한 배경이라든지, 월남한 동기 및 당시 판문점에서의 상황 등에 있어 처음부터 석연치 않은 점이 허다하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괴 거물급 언론인이라는 점을 감안, 승공 계몽활동으로서 순회강연, 라디오방송, 텔리비젼 기자회견 등 반공행사에 참여케 한 바 있으나 이수근(李穗根)은 반공연설과정에서 북괴학정의 핵심이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하여 폭로하는 일이 적었고 김일성을 비난하는 논지는 의식적으로 회피하는 경향이 노정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소 측근인물들과의 대화에 있어 『6·25는 북침이다』라는 등의 많은 의문점을 나타내기 시작하므로 당부(當部)는 그의 위장귀순문제에 혐의를 두고 다각적으로 검토 분석하는 한편 표면적 내지 본격적 수사는 피하고 이면적 감시의 강화와 내사를 계속하여 왔던 바 서울 종로거주 배경옥(裵慶玉)(남·29·재북 본처의 이질)과 해외탈출을 모의한 끝에 裵로 하여금 인장업자인 오제녕(吳濟寧)(남·43)을 포섭 吳에게 태국에 가서 인장업을 하면 월3백 불은 벌 수 있다고 꾀어 吳의 명의로 여권수속을 완료, 발급 받은 여권을 吳에게 주지 않고 콧수염과 가발로 변장한 이수근(李穗根)사진을 갈아붙인 다음 1월27일 裵와 같이 동일오후 5시30분 CPA기를 타고 국외로 탈출하므로 당부는 이를 추적 끝에 해외 모 지점에서 1월31일 캄보디아로 출국하려는 이들을 검거하여 2월1일밤 8시50분 공군기로 김포로 압송하여 왔다.
(2) 이 사건 관련자에 대하여는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을 적용, 철야수사를 진행 중에 있는데 현재까지 밝혀진 죄상은 다음과 같다. 이수근(李穗根)은 1967년 2월 중순께 북괴노동당 대남 사업 총국장 이효순(李孝淳)의 소환을 받고 동인의 안내로 괴수 金日成을 면담, 동 석상에서 金日成으로부터 『조국을 위하여 부하 된 사명을 다하라』는 격려를 받은 후 비밀 아지트에서 李孝淳으로부터
①판문점에서 극적인 탈출을 가장한 귀순방법으로 한국에 침투하라
②침투한 후 귀순동기를 『2·8절(괴뢰군 19주년) 기념행사 기사 작성시 김일성을 소홀히 다루었기 때문에 숙청대상이 되었음을 감지하고 탈출하였다』고 진술하라
③표면상 한국정부에 협조하여 신임을 획득, 신분의 합법을 쟁취하라
④여하한 악조건이 있더라도 적화통일이 될 때까지 장기 잠복하라는 등의 지령을 받고 67년 3월22일 판문점을 통하여 위장 귀순하였으나 한국국민의 철두철미한 반공사상으로 공작기반구축이 난관에 부딪치고 더욱이 당부의 감시가 심한데다가 무의식중의 언동이 갖가지 의문점을 남기게 됨으로써 자신의 정체가 탄로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한국 내에서의 임무수행을 포기하고 재북 본처의 이질인 배경옥(裵慶玉)을 포섭하여 대동 월북할 목적 하에 캄보디아로 탈출을 기도하였는바 이수근(李穗根)은 탈출 후 행동계획으로서 裵慶玉에게 보고서를 휴대시켜 주 캄보디아 북괴대사관을 경유, 북괴에 전달, 당의 승인을 얻은 다음 장차 북괴에 복귀하려 하였는데 李穗根의 보고서요지는①긴박한 사정에 의하여 공작지를 이탈한 것을 보고한다 ②당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 ③당에서 허락하면 제3국(캄보디아)에서 대남 우회공작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겠다는 등으로 되어 있음.
(3)이상이 이수근(李穗根)사건의 개요이나 현재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에 있어 사건전모를 발표치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사건수사에 있어서의 국민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는 물론 특히 이 사건과 관련된 낭설에 현혹됨이 없기를 바란다.
실패를 선전의 호기로 반전시켜
정보부의 발표를 계기로 터져 나온 언론의 보도는 정보부의 끈질긴 수사를 찬양하고 이수근(李穗根)의 배신을 인격적 차원에서까지 매도하는 방향이었다. 「그놈이 그럴 줄이야…」라는 컷 제목이 사회면 머리에 실렸고, 「사형도 모자란다」「흉물스런…」 따위의 원색적인 시민 반응이 그대로 기사화 되었다. 1969년은 6·25이후 한반도에서 긴장이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
1968년 1·21사태(청와대 습격기도사건), 그해 11월의 울진·삼척 무장공비 상륙 사건 등 북한의 대남(對南)공작이 남한을 베트남화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고 68년 1월의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69년 4월의 미 전자첩보기 EC121기 격추사건은 미국을 자극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남쪽에서는 예비군 창설로 맞서는 등 전운마저 감돌고 있을 때 터진 이수근(李穗根) 탈출 사건은 언론의 뭇매, 당국의 무리한 수사, 재판의 일사 천리식 진행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수근(李穗根)을 오판했고 해외탈출을 예방하지 못한 정보부의 실수는 일체 지적되지 않고 해외에서의 활약상만 부각되면서 김형욱(金炯旭)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선전의 호기로 반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일부 신문은 고위당국자(金炯旭을 가리킴)의 말이라면서, 「정보부가 李를 일부러 해외로 달아나게 하여 접선 현장에서 체포하는 것을 꾀했었는데 이는 증거확보와 함께 다른 조직까지 일망타진하려는 의도였다」고 선전해 주기도 했다.
조사책임자 증언: 『간첩아니다』
주월 한국대사관 2층에 이수근(李穗根)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정보부의 모 간부」는 기자의 취재로 홍필용(洪弼用)변호사(70)임이 확인되었다. 육군법무감출신인 그는 1964년에 중앙 정보부로 들어가 대공수사국장으로서 동백림 사건을 다루었고, 李穗根이 1967년 3월22일에 판문점을 통해 탈출해오자 그의 신병을 인수, 보름간 생활을 함께 하면서 위장귀순 여부를 조사했다. 그 뒤에도 1년간 李穗根의 남한생활을 관리한 인연이 있었다.
1969년 1월말에 洪씨는 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이었다. 태국에 출장 중이었다. 김형욱(金炯旭)부장의 긴급 지시에 의해 洪씨가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에 李穗根이 붙들려 끌어내려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洪변호사는 서울 광화문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간 기자에게 『이런 것을 지금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면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속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홍(洪) 당시 특별보좌관이 대사관2층에서 이수근(李穗根)을 대면하자 李는 처음에는 반가와서 눈물을 흘리더니 「할 소리, 못할 소리」를 막 털어놓더라는 것이다. 『날 못 잡았으면 모가지 달아나는 건데 우리 부장 또 영웅 되게 됐어』라면서 신나게 이야기한 李의 심리에 대해 洪변호사는 『비관이 너무 크니까 낙관적으로 돼버린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洪변호사도 『감찰실장의 무리한 감시와 李의 성격적 결함이 합쳐져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면서 『간첩은 아니었다』고 못박았다.
『金日成이를 많이 욕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심을 산 모양인데 진짜 위장간첩이라면 金日成이 욕을 더 열심히 했을 것 아닙니까. 李穗根의 성격이 자신을 죽인 겁니다. 그는 어떤 사회에서 살든 간에 불평불만을 많이 할 그런 사람이지요』
洪씨는 李의 성격을 「표독, 경박, 거만, 자유분방, 그러나 뒤가 없는」이란 말로 표현했다. 시계를 주었는데 시간이 자주 틀린다고 신경질을 내면서 풀어 던지고『새것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는가 하면 『金日成이가 나를 오라고 해도 안 가겠어』라는 농담을 해 오해를 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성격의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 있어요. 느긋하게 해야 하는데 방(方)실장은 사사건건 혼을 내는 식으로 했으니 갈등이 깊어진 겁니다. 이수근(李穗根)도 매를 맞을 만한 짓을 하기는 했어요. 하이얏 호텔 근방에 정보부 안가가 있었어요. 거기에서 李씨가 정착하도록 여자를 소개해 주었는데 서, 너 명을 퇴짜놓아 우리가 참 곤란했어요. 그 사람이 여자를 좋아했는데 북한에서 여자를 겁탈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물었더니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하고 되받더군요』
남한생활에 있어서 이수근(李穗根)의 불만은 정보부의 끊임없는 감시(그의 운전수와 가정부는 정보부에서 심어놓은 정보원이었고 전화는 도청되었으며 그의 감시 조가 따로 짜여 있었다)에 기인한 것 이외에도 또 있었다고 한다. 李는 당국이 제공해준 코로나 승용차를 타고 골프를 배우며 유명가수와 데이트도 하고 여교수와 결혼하는 등 유명인사의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한국사회의 범죄·퇴폐·부정 및 이를 보도하는 언론을 끝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살인·강도사건을 보도해서 뭘 하겠다는 것이냐고 흥분하는 것을 보고 역시 그는 북쪽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언론은 국민에게 안 알릴 권리도 있지 않나」면서 범죄보도가 그 수법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하더군요』
위장귀순 아니다
홍(洪)변호사는 이수근(李穗根)의 위장귀순여부를 판단한 부서의 책임자였음인지 『귀순동기가 딱 부러지게 나타나지 않아 판단하는 데 오래 걸리긴 했지만 위장귀순은 절대로 아니었다』고 단언했다. 李穗根과 같은 귀순자의 경우, 정보부에선 먼저 대공수사 차원에서 위장여부를 가려낸다. 순수한 귀순이라는 사실이 판명되면 공작담당 부서로 돌려 그가 가진 정보를 빼내는 작업을 한다. 洪변호사는 『李穗根이 직책은 높았지만 실권은 강하지 못했고, 남한언론인처럼 활동범위가 넓은 것도 아니어서 중요한 정보를 캐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다음 단계로서 귀순자는 심리전 부서에 넘어가 기자회견, 대중강연 등을 통해서 선전목적에 쓰여진다. 그 다음에는 시민화 되지만 정보부 감찰실의 감시를 받는다. 李穗根의 경우엔 정보부 판단관으로 취직(?), 매일 정보부로 출근하였었다.
『이수근(李穗根)은 귀순 직후부터 내가 그를 데리고 보름간 같이 있으면서 조사를 했고, 그 뒤에도 1년간 안가에서 생활하게 하고 대중강연· 좌담 등을 시키면서 관찰을 했습니다. 1년 뒤 관계관들이 회합하여 李는 위장귀순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지요. 그 회의에서 별다른 이견을 낸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판정 뒤로는 李에대한 감시를 다소 완화했을 것입니다』 서울지검공안부 최대현(崔大賢)부장검사가 이수근(李穗根)·배경옥(裵慶玉) 및 裵씨의 여동생 배인향(裵仁香)(당시 22세)과 김세준(金世俊)씨(당시 22세·李의 조카)를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한 것은 1969년 3월 22일이었다.
이들은 중앙 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검찰에 송치되었다. 구속 기속 할 때 검찰이 발표한 공소장에는 2월13일의 정보부 발표문에는 나오지 않았던 중요사실이 적혀 있다.
「68년 4월 사이공에서 일시 귀국한 이질 배경옥(裵慶玉)과 만나 북괴와 접선할 것을 모의기도 했고 68년 5월4일 하오 6시 李는 金日成의 집인 조선노동당 중앙당위원회 5호댁 앞으로 보내는 암호문을 작성했다. 이 암호문은「배은 망덕하고 고향을 떠난 불효자식(李수근 자신을 뜻함)을 용서해주십시오. 이제 잘못을 뉘우치고 사업을 하겠습니다. 여기에 약(북괴에 도움이 되는 재료)를 구해놓았으니 인편(북괴 지도원)을 보내주십시오. 지난 정월달에 그곳에서(북괴) 여기(한국)에 보낸 선물(1·21무장공비침투)의 답례로 무엇을 보내려고 하는데 그것을 받지 마세요.
나에게 인편을 보낼 때는 전쟁 때 죽은 금순이 삼촌의 이름을 대면 아버지가 보내주신 사람으로 믿겠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68년 5월5일 배경옥(裵慶玉)이 출국했을 때 이 암호문을 한글로 된 성경책 속에 감추어 홍콩에서 모스크바 천주교회에 우송토록 했다.
李는 또한 입북한 후 사이공에 체류할 배경옥(裵慶玉)을 통해 주월 군용기를 이용, 한국에 보내는 연락물건 속에 권총이나 무기 등을 한국에 반입키고 모의한 후 그 반입 루트를 ①평양―홍콩―사이공―서울 ②평양―프놈펜―사이공―서울 ③평양―하노이―사이공―서울로 정한 후 배경옥(裵慶玉)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裵가 월남여자와 국제 결혼하여 위장 귀화토록 모의했다」
우스꽝스러운 암호문
이 암호문이 진짜라면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암호문은 너무나 조잡하다. 우선 정보부의 1차 수사발표문에 이 결정적인 증거가 빠진 것이 이상하다. 정보부는 李와 裵씨를 수사한 지 13일째 되는 날에 발표문을 냈으니 수사기간은 충분하였다. 모든 것을 포기한 두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암호문이야기가 늦게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李모 간부는 『간첩으로 꾸미려고 암호문이란 것을 만들어냈겠죠』라고 했다. 간첩이 암호문을 직접 金日成에게, 그것도 우편으로 제3국을 경유해서 보내는 경우가 도대체 있을 수 있는가? 「배은망덕한 불효자식」이란 표현은 오히려 李의 귀순이 진심이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이수근(李穗根)은 1심 재판과정에서 『배(裵)가 모스크바 중앙교회로 부쳤기 때문에 金日成이에게는 전달되지 못한 것 같다』고 진술했다. 李穗根은 재판과정에서 암호문을 보낸 사실을 포함하여 모든 공소사실을 다 자백하였다. 이에 대해서 홍필용(洪弼用)변호사는 『어차피 죽을 것인데 빨리 죽자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공소장은 「金日成과 북괴를 폭로 규탄하면 북괴에 다시 가게 될 때 재기 불능하게 되므로 고민에 싸이게 되었다」고 했다.
공소장은 李穗根의 행선지가 북한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사이공에서 귀국한 배경옥(裵慶玉)을 만나 북괴와의 접선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홍콩, 프놈펜을 통해 입북키로 모의했다」고 했다. 李는 2심에서 「홍콩에서 裵를 소련대사관을 통해 입북시킬 생각도 했지만 소련 대사관을 통하면 환영을 받지 못할 것 같아 프놈펜으로 가기로 했다」고 진술했다. 이 공소 사실대로라면 李穗根은 거물 간첩으로서의 기초적인 소양, 즉 행동지침이나 접선 방법도 알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인간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상한 항소 포기, 서둔 사형 집행
이수근(李穗根)과 배경옥(裵慶玉)씨 외에도 여권위조를 도와준 피고인까지 합쳐 모두 7명이 재판을 받았다. 공판은 이례적으로 급속히 진행되었다. 1969년 4월10일 서울형사지법 합의6부(재판장 이상원(李相元) 부장판사, 배석 정상학(鄭相鶴)·진성규(陳成圭)판사)의 심리로 열린 1차 공판에서 피고인들은 공소사실을 거의 시인, 검찰 측 신문이 하루로 끝나버렸다. 4월24일의 2차 공판에서는 국선변호인의 신문이 있었다. 5월2일에 벌써 구형공판이 있었다.
이수근(李穗根)·배경옥(裵慶玉) 사형 김세준(金世俊)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李穗根은 최후 진술에서『거국적인 환대를 배신한 죄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기회를 한번만 더 주면 반공전선에 앞장서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배(裵)씨는 『나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른다. 李가 삼촌이라 도와주었을 뿐이다』고 최후 진술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5월 10일에 선고공판. 李·裵씨는 사형, 金世俊씨는 징역 6년에 자격정지 6년.
주심이었던 정상학(鄭相鶴)씨(현재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재판에 정보부의 간여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수근(李穗根)이 모든 것을 시인했기 때문에 합의할 때 형량에 이견이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간첩이란 데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1967∼69년은 간첩사건이 워낙 많았습니다. 난수표가 간첩의 증거로 많이 제출될 때인데 李穗根의 경우엔 가발과 가짜 콧수염이 증거로 나왔더군요』
원래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된 사람은 이해우(李亥雨)변호사였다. 그는「가증스런 李를 변호할 가치가 없다」고 변호 기피서를 재판부에 냈다고 보도되었다. 박원서(朴元緖)변호사가 그 뒤를 이어 李穗根을 변호했었다. 朴변호사는 李피고인을 한번도 면담한 적이 없이 변호했었다고 말했다. 『본인이 다 시인하니 변호래야 정상론을 펴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69년 5월10일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李피고인은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돼있다. 이 날짜 석간에는「뻔뻔하게 항소하다니 너무나 가증스럽다」는 제목의 시민반응이 실렸다. 「그러나 이수근(李穗根)은 항소만료기간인 5월17일이 지나도록 항소하지 않아 사형이 확정되고 말았다. 배경옥(裵慶玉)·김세준(金世俊)피고인은 항소, 2심에서 裵피고인은 사형에서 무기로, 金피고인은 6년 징역에서 5년으로 감형선고를 받았다.
李穗根이 왜 항소를 포기했는지는 미스터리다. 이왕 죽을 것 빨리 죽자는 심산이었는지, 재판에 협조하면 살려줄 줄 알았는지…. 당시 서울지검공안부 검사였고 李의 사형집행 때 참여하였던 김형하(金炯河)변호사는 『李는 수사나 재판에 고분고분 협조하면 살려주어 활용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수근(李穗根)이 서울구치소에서 수감돼 있을 때 교무계 직원이었던 고중렬(高重烈)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가죽수갑을 찬 채 포승에 묶여 2사(舍) 상(上)의 25방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독방이었다. 문 앞에는 정보부 직원이 의자를 갖다 놓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우리 구치소 직원들도 정보부 사람의 양해를 얻고 李피고인을 만날 수가 있었다. 사형수는 종교적 교화대상인데도 접촉이 금지돼 종교담당인 나는 그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정보부가 그 힘이 최강일 때, 수사단계에서 수감생활까지 철저하게 李穗根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李의 운명이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되었는지는 외부인이 알 수가 없었다.
이수근(李穗根)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은 1969년 7월2일 오전이었다. 귀순한 지 8백33일 만에 , 형이 확정된 지 두 달도 안된 날에, 더구나 종범인 배경옥(裵慶玉) 등 피고인들의 항소가 서울고법에 계류중인 데도 주범을 사형 집행해버린 것은 사법의 관행에 있어서 그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당시의 한 정보부 간부는 『김형욱(金炯旭)은 李의 문제를 강박관념처럼 지니고 다녔다. 李의 입을 영원히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서둔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당시 법무장관은 이호(李澔)씨(전 적십자사 총재)였다. 사형집행 명령서는 법무장관이 서명하는데, 李씨는 『그 사건은 기억이 나지만 집행 명령서에 서명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고 했다.
20년째 복역중인 裵慶玉
이수근(李穗根)이 저승으로 가고 없는 지금 진실을 캐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는 배경옥(裵慶玉)씨다. 기자는 裵씨를 찾아 나서기에 앞서 그가 비록 무기선고를 받았으나 석방돼 서울 어디에선가 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李穗根탈출사건에서 裵씨가 한 일은 李에게 오제녕(吳濟寧)의 이름으로 된 위조여권을 만들어준 일뿐이었기 때문에, 시국사범처럼 감형, 형 집행정지, 사면 등등의 그 흔한 특례조치로써 훨씬 전에 옥문을 나와 과거의 악몽을 잊으려고 더욱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구속될 때 청년이었던 裵씨는 51세란 초로(初老)의 나이에 지금도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지난해 12월21일에 겨우 무기에서 징역 20년으로 감형돼 오는 12월22일에 만기 출소하게 돼 있다. 그는 형이 확정된 지 1년 반 만에 일찌감치 전향서를 썼는데도 다른 혜택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서울 중곡동에는 裵씨의 어머니 金모씨(75)가 지금도 생존해 있었다. 金씨의 여동생 김순배(金順培)씨가 이수근(李穗根)이 탈출할 때 북녘에 남기고 온 본처이다. 배경옥(裵慶玉)씨는 1955년7월에 육군에 입대, 탈영했다가 붙들려 3년간 복역한 뒤 제대했었다. 이 전과로 출국을 못하게 되자 이복형의 이름을 빌어 여권을 내 월남에 취업했다가 1968년 7월에 귀국했었다. 다시 출국하려고 할 때 여권을 잃어버렸다. 이때 李穗根을 알게 되어 운명이 바뀐 것이었다.
裵씨를 가끔 면회 가는 그의 동생 裵모씨(45)는 『한번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형과 이야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집행유예로 풀려 나온 여동생의 이야기 등을 종합해 보면 형은 李穗根이 정부의 양해하에 어떤 임무를 띠고 외국으로 가는 줄 알았다가 홍콩에서 비로소 속은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고 했다. 배경옥(裵慶玉)씨는 그림에 취미를 붙여 전시회에서 입상한 적도 있다고 한다. 裵씨는 정식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朴모 여인과의 사이에 남매를 두었었다. 裵씨가 감옥에 간 뒤 그 관계가 끊어졌다고 한다.
배(裵)씨 집안은 얼굴도 모르는 이모부 이수근(李穗根)의 출현에 의해 풍지박산이 된 셈이다. 배경옥(裵慶玉)씨의 여동생 裵모씨(41)도 외국 나간다는 오빠를 김포공항까지 출영 나간 죄로 구속돼 1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었다. 裵여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李穗根씨가 이강월(李江月)씨와 결혼하기 전에 그분의 집에서 한 여섯 달 동안 집을 봐주고 부엌일도 해주곤 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오빠가 지프차를 몰고 와서 저를 앞자리에 태우고 김포공항으로 갔었지요. 지프차 뒷자리에는 오빠와 김세준(金世俊)학생, 그리고 李씨가 타고 있었는데, 李씨는 변장을 했었기 때문에 누구인 줄 몰랐지요. 저는 선천성 심장기형으로 늘 약을 먹어야 하는 몸인데 정보부에 끌려가서 1주일간 몹쓸 고문을 당했습니다. 후유증으로 고생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조카 金世俊씨의 증언
이수근(李穗根)에게는 이길성(李吉星)이라는 여섯 살 위의 누님이 있었다. 李여인은 첫 결혼한 남편이 폐결핵을 앓자 별거했다가 월남하여 김영섭(金永燮)씨(지난 81년에 71세로 사망)와 재혼했다. 그 사이에 난 아들이 이세준(金世俊)씨였다. 李여인은 金군을 낳은 직후에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고 김영섭(金永燮)씨는 재혼했다.
김세준(金世俊)씨는 李穗根이 홍콩으로 탈출할 때 22세의 연세대 정외과 1학년 학생이었다. 金씨는 李穗根이 이문동의 정보부 안가에서 살 때부터 이강월(李江月)씨와 결혼하여 성북구 삼양동에서 살 때까지, 그리고 李가 CPA기 편으로 김포를 떠나던 그 순간까지 근 2년간 李씨를 따라다니며 개인 심부름을 한 사람이다. 일부 신문에는 金씨를 李穗根의 개인비서라고 쓸 정도였다. 李의 도망을 방조한 혐의로 징역 5년형을 다 살고 지난 74년에 대전교도소를 나왔던 金씨는 지금 부산에서 보험 모집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기자와의 2시간에 걸친 전화인터뷰에서『외삼촌이 간첩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거듭 주장했다.
金씨가 李씨의 홍콩 행을 안 것은 1969년 1월27일 바로 그날 오전이었다고 한다. 서울 북창동 어느 여관에서 이수근(李穗根), 배경옥(裵慶玉)씨와 함께 투숙, 은행에 가서 원화를 달러로 바꿔오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裵씨가 여권을 金씨에게 맡기고 은행으로 갔는데, 李穗根의 변장한 사진이 오제녕(吳濟寧)이름의 위조여권에 붙은 것을 보고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李穗根은 이 자리에서 조카 金씨에게 대강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하더라고 했다.
『여기도 자유가 없다. 강연할 때 써준 원고대로 읽지 않았다고 불러서 때리곤 하는데, 지식인의 양심상 남이 시키는 대로 할 수도 없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제3국으로 가기로 했다. 지금 정보부에서는 3선 개헌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는데 외국에 나가서 이 사실을 신민당 유진오 당수에게 알려 줄 생각이다. 내가 출국한 뒤에는 아마도 정보부에서 너를 불러다가 괴롭힐 것 같은데 학생인 너를 심하게 할 수야 있겠는가』
검찰 공소장에는 「李는 김세준(金世俊)에게 3개월만에 이북으로 데리고 가겠으니 경북 법흥사에 숨어 있으라고 했다」고 돼 있다. 金씨는 『법흥사는 나의 작은아버지가 주지로 있는 절인데 삼촌이 나에게 그 절에가 있으라는 얘기는 했지만 북으로 데려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보부에서 쓴 진술서는 고문에 못 이겨 살고 보자고 시키는 대로 한 것이다』면서 이를 부인했다.
金씨는 『만약 그때 삼촌이 간첩 같았다면 내가 먼저 신고했을 것이다. 삼촌은 평소에도 정보부 사람들이 괴롭힌다고 나에게 털어놓은 적도 있어, 그때의 순진한 생각으로 내가 좀 고생하더라도 삼촌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그래서 28일 밤에 정보부로 불려가 「이수근(李穗根)의 행방을 대라」는 추궁과 고문을 받았지만 다음날 아침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고 했다. 29일에 정보부 수사관들은 金씨에게 편지를 하나 쓰게 했다. 「외삼촌께서 돌아오시면 처벌을 받지 않고 다 용서될 것이다」는 요지였다. 수사관들은 이 편지를 갖고 홍콩으로 갔다고 한다.
李穗根, 재판에 너무 협조적
金씨는 또 『삼촌은 가끔 「김일성이가 쳐 내려오면 나를 맨 먼저 잡아죽일 것이다」고 했다. 출국하는 그날에 삼촌은 영어사전을 샀는데 북한으로 갈 마음이 있었다면 영어사전을 살 필요가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삼촌은 남한 사회의 도덕적 문란,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에 대해서 가끔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삼촌은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서로 자존심이 세어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李穗根은 1968년 8월28일에 우석대학교 물리치료과 주임교수 이강월(李江月)씨와 결혼했었다. 金씨에 따르면 두 사람은 봉급을 나누는 문제 등 사소한 것으로 의견충돌이 잦았다고 한다.
金씨는 수사·재판과정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정보부에서 20일간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물 고문은 당하지 않았지만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했습니다. 갱 영화에서 보면 여러 명이 삥 둘러서서 한사람을 축구공 차듯이 이리저리 돌려가며 치는데 꼭 그런 구타였습니다.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진술서를 썼는데 검찰로 송치돼 구치소로 넘어 와서는 변호사를 한번도 면담한 적이 없고, 검사신문을 구치소에서 꼭 한번 받았어요.
정보부 직원이 입회를 했더군요. 「전에 한 진술이 틀림 없느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요. 몇 마디 더 물어본 뒤 볼펜과 종이를 넣어줄 테니까 자술서를 다시 써 달라고 한 뒤 가버렸어요. 그러나 볼펜과 종이는 끝내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판사들도 진실을 밝히겠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더군요. 교도관들도 「공연히 재판정에서 똑똑한 척 하지 말라」고 하고…』
金씨는 이수근(李穗根)·배경옥(裵慶玉)씨가 『재판에 무척 협조적이었다』고 했다.
『나에게 법흥사에 숨어 있으면 이북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는 대목까지 삼촌이 시인 하길래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협조하면 살려준다는 보장을 받았다고 생각했지요. 삼촌은 재판을 받으면서 생기에 차 있었고, 구치소에선 운동도 열심히 하더군요. 재판 때 붙어 다니던 정보부 요원이 공판이 끝난 뒤 교도관에게 「돌아가거든 목욕시켜 주라」고 지시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삼촌의 손등은 거죽이 벗겨지는 등 고문 받은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金씨가 2심에 계류중일 때 李穗根이 사형집행 당했는데,『간수가 「신부님이 눈물을 흘리며 나오더라」고 일러주면서 나를 위로해 주더라』고 했다. 金씨는 『배경옥(裵慶玉)씨를 만나면 왜 재판 때 그런 식으로 예, 예만 했는지 꼭 묻고 싶다』고도 했다.
1974년 2월에 출소한 金씨는 대전에서 살다가 그 이듬해에 발효된 사회 안전법에 의해 주거제한처분을 받게 되었다. 당시 대전지검 이한동(李漢東) 부장검사가 신청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지난 81년에 양모는 지난 80년에 사망했다. 아버지가 위독해도 경찰서장의 여행허가가 나지 않아 제때에 가지 못했고,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도 허가가 지체되어 상주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고생을 남의 집 딸에게까지 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서 한때는 결혼을 단념했던 적이 있었다.
다행히 부산에서 취직이 되자 주거제한이 보호관찰로 풀려 3개월마다 한번씩 동향보고만 경찰서 정보과에 내면 되었다. 지난 80년에는 결혼도 했다는 그는 지난 연말에 보호관찰에서도 해방되었다고 한다.
북한탈출현장 목격기
이수근(李穗根)이 달아났다가 붙잡혀오자『평소에도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정보부에서도 李에게 늘 의문점을 두고 면밀히 관할해 온 것은 사실이었다. 당시 수사과장 이용택(李龍澤)씨(전 국회의원)는 『북한탈출 동기가 석연치 않아 일단 강연·좌담 등을 시키면서 분석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었다. 청중들이 「저 친구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여 우리가 그를 다시 불러 추궁했으나 확증이 없어 감시만 해 왔었다』고 했다. 李씨는 李穗根이 탈출할 때 판문점의 북한측 경비병들이 李가 탄 차를 겨냥하지 않고 45도 각도로 공중을 향해 쏜 것도 이상하다고 판단하여 사진을 분석하기도 했다.
이수근(李穗根)에 대한 의문점은 ①탈출동기의 석연치 않음 ②경비병들의 사격 자세 ③방송이나 강연에서 金日成을 욕하려 하지 않은 점 따위가 주로 꼽혔었다. 李를 조사했던 홍필용(洪弼用) 당시 수사국장은 『귀순군인의 경우엔 동기가 단순하지만 지식인인 李穗根의 경우에는 그 동기도 관념적일 수가 있으며, 위장귀순 했었다면 金日成이를 더욱 심하게 비방했을 것이다. 李는 지식인으로서 자존심이 대단해 金日成이를 비난하는 원고를 주면, 유치하다면서 그대로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수근(李穗根)의 탈출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기자는 당시 동양방송의 김엽(金燁)씨였다. 그는 1967년 3월22일 오후 5시25분쯤 이 긴박한 장면을 목격, 임시뉴스로 보도했다. 이 특종으로서 제1회 한국기자상(한국기자협회 제정)을 받기도 했었다. 그의 특종기를 인용한다. 「22일 제2백42차 본회의가 예정대로 상오 11시 정각에 시작됐으나 회의 내용은 시시했다. 안건도 별것이 아니었다. 상호간에 내용 없는 설전이 오갔다. 오후 4시5분, 회의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유엔 측 기자 인솔장교가 예고도 없이 기자들에게 『서울로 갑시다』고 통보했다. 이때는 괴뢰대표 박중국이 한창 반미발언을 하다가 『나도 더 이상 제의할 만한 안건이 없으니 휴회하자』고 제의하는 찰나였다.
그래서 우리측 기자 30여명은 철수를 시작, 나도 녹음기를 메고 나오다가 문득 이상한 감촉이 온몸을 스쳤다. 여태까지 10여년 동안 판문점 주변을 취재했어도 미군 측의 요청으로 기자들이 철수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떠나는 버스에는 탈 생각을 않은 채 군사 정전위 유엔 측 연락장교실 막사로 갔다. 유엔군 측은 경비대장 톰슨 중령도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본 회의장주변에 나타났다.
괴뢰경비병들은 회의가 끝날 무렵에 배치되는 정 위치에 서 있었으나 유엔 측 치콜렐러 소장은 공산 측 휴회제의를 묵살하고 계속 공산 측에 대한 공격발언을 하고 있었다. 오후 6시5분, 치콜렐러 소장의 마지막 발언이 시작될 무렵, 자유의 집 북쪽에 대기하고 있던 우리측 대표단의 승용차가 본회의장 유엔 측 출입문 앞으로 평상시보다 좀 빨리 대기했다.
그 당시 공산 측 기자 4, 5명이 유엔 측 대표가 있는 북쪽 유리창 문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으며 이들 속에 이수근씨가 끼어 본회의장과 자유의 집을 두리번거리며 서성댔다. 오후 5시23분 유엔측의 마지막 발언에 대한 중국어 통역이 끝나고 양측 대표가 퇴장하려고 일어서는 순간, 유엔 측 영국대표 세단(USA SG104)의 본회의장에 면한 뒷문이 열리면서 40세 가량의 괴뢰기자 1명이 뛰어 들었다. 뒤따라 군복차림의 유엔군 1명이 올라탔다. 이 세단 앞자리에는 톰슨 중령이 재빨리 탔다. 이 순간 주변에 있던 괴뢰경비병 1명이 톰슨 중령의 오른 팔을 잡고 당기며 매달렸다. 이미 자동차는 발동이 걸려 움직이는데….
톰슨 중령은 손을 잡은 괴뢰경비병을 밀어 제치면서 문을 닫고 치콜렐러 수석대표 차를 S자형으로 앞질러 전속력, 일로 남으로 향했다. 괴뢰경비병들은 『야!』하면서 고함을 질러 주변에 있던 괴뢰경비병 30여명이 남쪽 통로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집결했다. 괴뢰경비대장으로 보이는 한 명이 권총1발을 하늘로 발사하자 괴뢰경비병들은 일제히 세단의 뒤를 쫓으며 발사했다.
그러나 이 무렵 세단 차는 본회의장 남쪽에 있는 언덕길을 넘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이 언덕길에 괴뢰경비병들이 당도했을 때 세단 차는 남방공산초소 앞 차단대를 돌파했었다. 이수근씨가 차에 타서 괴뢰군초소 차단대를 돌파, 귀순하기까지의 20초, 극적인 탈출, 순간적인 민완동작이었다」
미국 측 의견, 「간첩증거 없다」
이수근(李穗根)은 귀순할 때 미리 군사정전위 사무국의 한국인 직원에게 뜻을 전했고, 이 연락을 받은 유엔군 측 치콜렐러 소장이 李를 받아들이도록 승용차와 인원을 배치하였던 것이다. KBS 국제방송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집(金鏶)씨는 북한경비병들이 李가 탄 세단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지 않았다고 의심하는 데 대해서 『판문점 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고 했다. 『공동관리구역 안에서는 쌍방간 시설물 공격을 못하게 돼 있습니다. 이 구역 안에는 권총만 갖고 들어가게 돼있고요. 북한경비병이 하늘을 향해 위협사격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만약 조준사격을 했다면 UN측 경비병의 보복사격을 받아 총격전으로 확대되었을 것입니다』
이수근(李穗根)의 북한 탈출과 그의 체포에는 미군과 미 정보기관이 깊게 개입했다. 미군은 북한탈출을 도왔고 CIA는 그의 체포를 도왔다. 그래서 기자는 미국 측 정보기관에 李穗根에 대한 판단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은밀히 물어보았다. 李에 관한 자료를 뒤져본 한 미국인은 『李가 간첩인지 아닌지 우리로서는 판단할 자료가 없다』고 했다. 이 말은 『李가 간첩이라는 자료를 우리는 갖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미국정보기관의 판단이 한국정부 및 사법부의 판단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 기사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자는 李穗根을 교수대로 보내는 데 실무적인 역할을 했던 당시의 정보부 수사간부·검사·판사들도 많이 만나 보았다.
당시 서울지검 검사로서 배경옥(裵慶玉)씨를 담당했던 한 현직검사는 『裵는, 영감님 제가 살겠습니까, 라고 애원 조로 묻는 등 생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고 했다. 검찰조사는 정보부의 수사를 재확인하는 정도였다고 한다.『이수근(李穗根)이 항소포기를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고 했다. 그는 또 『李穗根이가 감옥에서 털옷을 넣어달라고 해서 아내에게 연락해주었는데 답이 없었다』고 했다. 이 검사에게 기자는 「李穗根의 도망이 북한으로 가려는 목적이 아니라 제3국으로의 정치적 망명으로 생각된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는 다 듣고 나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했다.
전창희(全昌熙) 수사국장과의 일문일답
사이공에서 붙들려 온 이수근(李穗根)을 조사한 것은 정보부 대공수사국 이었고 당시 국장은 全昌熙씨였다. 서울 한남동에 살고 있는 全씨(68)을 찾아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정보부에서 항소포기를 권유했나?
『그런 일 없다』
-왜 종범들의 재판이 진행중인데 李를 서둘러 처형했나?
『그 과정은 자세히 모르지만 그런 거물은(공산당에 의해) 독살 당할 위험이 있고…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김형욱(金炯旭)은 사석에서 『이수근(李穗根)은 빨갱이가 아니다』고 했다는데…
『그것은 金부장의 변명일 것이다. 李가 귀순했을 때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데 대한… 김부장이 너무 서둘러 李를 선전 목적에 이용하여 밑에서는 반발이 컸었다』
-李穗根이 왜 金日成에게 보내는 암호문을 하필 교회로 부쳤나?
『교회는 성역이니까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모스크바 중앙교회로 부친 암호문은 金日成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데…
『암호문에 대해서는 박삼철(朴三喆) 수사단장으로부터 보고만 받아 잘 모른다』
-왜 정보부 발표문에는 암호문 이야기가 없나?
『그런 사항은 원래 발표하지 않게 돼 있다』
-기소장에는 실렸는데.
『그것은 범죄사실을 적시하는 것이니까』
-집행될 때 李는『김일성 만세!』도 안 부르고, 중립국으로 가서 살려했다고 말했다는데. 『어설픈 간첩이 「김일성 만세」를 외친다. 대구폭동을 주도한 이재복이도「대한민국 만세!」하고 죽었다』
-李가 金日成이 욕을 한다고 해서 재기불능이 되나? 더구나 金日成이 직접 李를 만나 임무를 부여했다고 정보부 발표문에 적혀 있지 않은가.
『북한의 다른 사람들은 李가 金日成을 비방한 의도를 모른다』
북한 전문가이며 이수근(李穗根) 해외탈출사건 수습에 관여했던 당시의 정보부 간부는 『나는 조(趙)기자의 생각에 동의한다』면서 『李가 캄보디아로 가려 했다는 것은 그가 북한으로 가려는 뜻이 없었다는 증거가 아닐까』라고 했다. 그는 『북한으로 가려면 홍콩에서 바로 구룡반도를 통해 중공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쫓기는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뭣 하러 프놈펜까지 가려 했겠느냐』고 반문했다.
기자는 전창희(全昌熙)씨 밑에서 수사단장으로 근무하면서 李穗根 신문을 지휘했던 당시 수사과장 이병정(李炳丁)씨(현재 미륭건설 부사장)에게 『암호문이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껴진다』고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李穗根이 남한에서 지하간첩활동을 했다든지, 접선·무전교신 따위를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고급 2중 간첩이었으므로 북한의 대남 공작 부서가 직접 관리했던 하급 간첩과는 다르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가 갖고 달아났다가 압수된 노트 8권에는 남한 사회에 대한 자세한 견문기록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기록과 그의 행동들을 분석해보니 李가 공산주의 이념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수사 실무자일수록 감이 정확한데 저는 그가 간첩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가 사형 집행장에서 남긴 이수근(李穗根)의 유언이야기를 전해주니까 이병정(李炳丁)씨는 『그렇게 말하면 관용을 받을까 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현실 속의 이명준(李明俊)?
이수근(李穗根)을 간첩으로 판단하도록 한 것은 수사·재판 과정에서 한 자백과 해외로 달아났다는 구체적 행동과 귀순·남한생활에 얽힌 의혹이지 물증은 없다. 무전기도, 난수표도, 암호문도, 국가 기밀을 탐지하여 북한에 보낸 증거도 제시되지 않았다. 그런데 李穗根이 보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이대용(李大鎔), 홍필용(洪弼用), 그리고 사형 집행자들에게 한 말은 법정에서 한 말과 달랐다.
어느 쪽의 李穗根 말을 믿느냐가 문제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개인의 안전보다 공직자의 의무를 택한, 반공정신의 상징적 인물인 이대용(李大鎔)씨를 신뢰하고 李씨에게 한 김형욱(金炯旭)의 실토를 믿는다면, 법정의 판단은 어찌 되었든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고, 분단상황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다가 생각이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은 비극의 지식인이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수근(李穗根)은 홍콩 경찰관에게『나는 간첩이 아니라 정치적 망명자다』고 주장했다는데, 기자가 만난 많은 정보부 관계자들조차 이 주장에 진실성을 부여하였다. 문제는 남북간에는 「정치적 망명」이란 개념이 아예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남과 북을 다 거부하고 중립국으로 가는 배에서 자살한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李明俊)과 서울구치소에서 목졸려 죽은 李穗根의 죽음은 「20세기의 한국적 비극」을 상상과 현실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준 두 사례인 셈이다.
李明俊과 李穗根은 다 같이 기자출신이었다. 李明俊이 살았다면 李穗根과 나이도 거의 같았을 것이다. 작가 최인훈(崔仁勳)씨는 李穗根을 모델로 하여 또 한 편의 「광장」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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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근처형 직후 노동당 비밀강연(1)
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
■망명(亡命) 북한 노동당 간부의 폭탄 증언(證言)/이수근(李穗根)처형 직후 노동당 비밀 강연 내용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결정적 증언『나는 이수근(李穗根)의 이웃에 살았다. 그의 가족은 북에서 숙청되었고 그는 변절자로 매도되었다. 「이수근(李穗根) 위장 귀순 간첩설」은 김형욱(金炯旭)의 조작이다. 남한에 귀순하고 싶어도 제2의 이수근(李穗根)신세가 될까 봐 포기한 이도 많다…』
<1991년 10월 월간조선>
인용부호를 벗기기 위해
본 기자가 1989년 3월호 월간조선?쓴 기사의 제목은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였다. 이 제목에 따른 설명문은 그를 체포한 이대용(李大鎔)공사, 그를 조사했던 홍필용(洪弼用)국장 등 당시 정보부 간부들이 털어놓은 20년만의 진실-『그것은 김형욱(金炯旭)의 조작이었다』로 돼 있었다. 제목에 『』부호를 붙인 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이 아니라 일부 정보부 간부들의 「주관적 진실」 또는 「주장」이란 의미를 깔고 있었다.
기자가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주장에 완전히 동조하는 것은 아니며 그 「주장」에 대한 책임을 질 입장은 아니라는 방어적 성격의 인용부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주장을 2백자원고지 1백20장 분량의 기사로 소개했다는 것 자체가 「신뢰성이 있다」는 기자의 판단을 전제로 한 행위였다.
기자는 그 뒤 이 인용부호를 벗겨보려는 생각을 줄곧 지니고 다녔다. 주장을 「사실」로 만들?보고자하는 욕심이었다. 생각이 있으면 사람이 찾아오는 듯 그 뒤 2년여 기자는 이수근(李穗根)씨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어렴풋하던 상황이 보다 명료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2년7개월만에 속편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찾아왔다.
최근에 기자는 1988년 4월에 남한으로 귀순해 왔던 북한 노동당 간부 이정민(金正敏)씨(48)를 만났다. 버릇대로, 그러나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고 『이수근(李穗根)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뜻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분을 잘 알지요. 여기 와서 안기부에서 똑같은 질문을 하더군요. 제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사람 간첩 아니라고요. 「당신네들의 자작극」이라고요.』
金씨는 남한으로 망명할 당시 북한 노동당 간부부에서 직영하는 외화벌이 사업체 대양무역회사의 사장이었다. 이 직급은 노동당중앙위원회의 지도원, 대학교수, 외교부 대사, 군의 소장 급과 같다고 한다. 한국에 망명한 최고위급의 북한인사다. 그만큼 북한 지배층의 내부사정에 정통한 이다.
-그러면 이수근(李穗根)씨는 왜 남各막?달아났습니까?
『저는 직접 그 이유를 듣지 못했고 부모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만 기억합니다. 김일성이 인민군 벙커를 방문할 때 그가 수행했답니다. 김일성은 머리를 숙여가며 좁은 벙커 안으로 들어가 인민군들을 격려했는데 수행기자인 그는 바깥에 있었다고 해서 비판을 받게 되었답니다. 숙청되면 판문점 취재도 불가능해지므로 판문점에 접근할 자격을 빼앗기기 전에 서둘러 탈출을 결행했겠지요.』
이수근(李穗根)씨의 수기
이수근(李穗根)씨는 남한으로 넘어온 다음 해(1968년 4월)에 쓴 수기 「장막을 헤치고」(정보부에 의해 판매 중지된 책)에서 귀순의 직접적인 동기로 보이는 사건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다. 그는 먼저 북한의 언론규제를 비판했다. 「거기에는 기자들이 글을 써도, 2중 3중의 검열을 거쳐야 하며, 필자의 동의 없이 간부들에 의해서 원고가 많이 수정되는 현상을 흔히 보게 된다.
기자들이 취재를 해도 그 사회의 좋은 면만을 취재해야 하며, 글을 써도 공산당과 김일성의 정책을 찬양하는 글만을 쓸 수 있지 그것을 비판하는 글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다. 심지어는 그녀들의 정책을 지시하는 글이라도 그들이 요구하는 틀에 맞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검열의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 수많은 글을 쓰다가도 용어 하나라도 잘못 쓰게 되면 필자의 사상 문제로 취급되며 자칫하면 숙청 당한다.」
「1966년 말에 있었던 사건이 하나 생각난다. 부인들을 독자 대상으로 하는 한 잡지사에서 잡지 창간 20주년 기념 행사를 가졌다. 그런 기념 행사는 북한에서 그리 의의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앙통신에서 보도를 안 해도 무방한 것이다. 그러나 통신사의 한 기자는 생각하기를 거기에는 괴뢰정부 요원들의 부인들도 나올 수 있고 하니 보도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 끝에 그것을 게재했다.
그런데 그 기자는 기념 모임에 늦게 갔기 때문에 회의에서 한 보고서만 빌려 가지고 왔다. 보고서의 내용을 보고 그의 중심 사상을 따서 기사를 만들 작정이었다. 그가 자기 사무실에 돌아와 보고서를 읽어본 즉 20분간에 읽는 보고서에 김일성에 대한 찬사가 열 다섯 마디나 있었다고 한다.
그 기자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기사를 쓰기를, 『기념 모임에서는 김일성에 대하여 감사를 드렸다』는 말을 꼭 한마디만 쓰고 다 잘라 버렸다. 기자의 생각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기사도 남 보기 쑥스럽지 않고 김일성의 위신도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5백자 미만의 짧은 기사에서 김일성에 대한 찬사를 열 다섯 번씩 한다면 그것은 찬사가 아니라 오히려 야유로 되고 말 것이다. 나는 그 기자가 원고를 잘 처리했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이튿날 그 기사가 신문에 나자 그 회의에 참석했던 간부의 부인들이 이 기사를 보고 당에다 고소를 했다. 『우리는 회의에서 김일성에 대한 찬사를 열 다섯 번씩 하면서 매번 박수를 쳤는데 통신 기사에는 왜 그것을 다 잘랐는가?』라고 …. 당에서 통신사를 지도한다는 선전부의 한 간부는 그 이튿날로 통신사에 나타나 그 기자를 철직 시키는 문제를 지시했고 그런 원고를 통과시킨 부사장에게도 비판이 가해졌다.」
기자로서의 비애
李씨는 이번에는 자신이 당한 사례를 소개했다. 기자의 직업주의가 얼토당토 않는 당 관료의 교조주의에 짓밟혀버리는 비애를 털어놓고 있다. 「1967년2월 내가 대한민국으로 넘어오기 바로 전에 있던 일이 또 하나 생각난다. 2월8일은 괴뢰군을 창건한 지 열 아홉 돌이 되는 날이다. 이날 김일성은 괴뢰군을 축하하기 위하여 한 부대를 방문했다. 김일성이가 나가는 바람에 나도 따라 나갔다.
부대에서 오찬회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김일성은 약 5분간의 짤막한 연설을 했다. 내용인 즉 괴뢰군에 대한 치사였다. 내가 듣기에는 그 말에 하등 새로?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데리고 있던 기자에게 기사 내용에서 괴뢰군이 김일성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는 말을 강조하여 쓸 것을 지시했다. 왜냐하면 그때 서방통신에 나기를, 평양에서는 괴뢰군이 폭동을 일으켜서 김일성을 감금했다는 뉴스가 떠돌았기 때문에 그런 여론을 반박하는 의미에서 괴뢰군이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장면을 그대로 써넣으라고 했던 것이다.
그 통신이 나간 후에 어찌하여 그 통신에 김일성이 오찬회에서 연설한 내용을 쓰지 않았는가 하고 나에게 추궁이 왔다. 나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김일성의 연설인즉 괴뢰군이 강하다는 소리였는데, 그 기사에는 괴뢰군이 강화되었다는 얘기도 강조되어 있다. 그런데 그 말은 괴뢰군의 조직자이며 지휘자인 김일성이가 말했다고 하는 것보다는 기자의 소감으로 서술하는 것이 훨씬 객관적이어서 좋을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이가 그렇게 말했다는 표현을 피한 것이라고….
또 기사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성을 띤 정치적 문제(이미 서술한 바의 김일성 감금 운운?뉴스를 반박한 것)가 강조되었다고 …. 나의 답변에 그들의 말문이 잠시 막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원래 내게 대하여 벼르고 벼르던 참이라 이 기회에 이런 자유주의자를 대열에서 제거하기로 단안을 내렸던 것이다.
그 덕분으로 난 오늘 서울에 앉아서 이런 글도 쓰게 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물론 내가 그곳을 버리고 이곳으로 오게 된 동기는 이외에도 있다.」 김정민(金正敏)씨가 간접적으로 들었던 탈출이유와 李씨가 직접 털어놓은 사연은 구체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金日成에 대한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점에는 일치하고 있다. 이수근(李穗根)씨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기자였다는 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李穗根은 1924년 황해도 서흥군 구포면에서 났다. 구포중학교 4년을 중퇴하고 수안군 농회 기수(技手)로 있던 중 1944년에 일본군 징병1기로 입대하여 중국 무한지방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는 1946년 9월에 북조선 노동당에 입당하였다. 李씨는 입당직후부터 줄곧 기자로 일했다. 「황해도 노동신문기자→노동신문 기자 겸 당 생활부장→개성시 당 기관지인 개성신문사의 주필→직업총동맹(남한의 노총과 비슷한 기구)기관지인 노동자 신문사 주필→중앙통신사 부사장」이라는 승진경로가 보여주듯 엘리트 언론인의 길을 밟아온 것이다. 기자는 어떤 체제에서 살든 간에 자유분방한 제2의 천성을 갖게 된다. 李씨의 숙명은 바로 그런 속성에서 비롯되었다.
자유분방한 기자였다는 점 중요
이수근(李穗根)에 대한 검찰 공소장은 李피고인이 위장 귀순하게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1967년 2월 8일 괴뢰군 창립 제19주년 기념행사가 서해안 방위사령부에서 있었다. 피고인은 취재 책임자로서 김일성을 수행하여 그 행사를 보도함에 있어서 괴뢰군이 김일성을 열렬히 환영하였다는 내용은 보도하면서 김일성의 연설 내용은 보도하지 않았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당 중앙 위원회에서 조사를 하게 되었고 숙청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2월 중순 북괴 노동당 남조선국 국장 이효순(李孝淳)은 피고인을 소환하여 남파지령을 내린다. 피고인은 이 지령을 이행하면 재기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이를 수락하고 3일간 간첩교양을 받았다. 피고인은 위장 귀순한 뒤 공작지를 이탈하는 일 없이 장기매복 할 것 등을 지시 받았다.」
3일간의 교육으로써 과연 자유분방한 성격의 언론인이 은인자중 해야하는가? 위장귀순간첩으로 바뀌어지는가? 李씨가 귀순했을 때 그 귀순의 진실성 여부를 조사하는 책임자였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홍필용(洪弼用)씨(현재 변호사)는 지난 89년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었다. 『 그의 귀순은 위장이 아니었다. 그를 1년간 관찰한 뒤 정보부의 관계관 회의에서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는 표독·경박·거만·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느 사회에서 살든지 불평을 많이 할 사람이다. 다시 김정민(金正敏)씨에게 묻는다.
-이수근(李穗根)씨의 경우 숙청된다고 해서 감옥에 가는 것도 아닌데 처자식을 남겨두고 탈출을 합니까?
『저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저는 평양으로 소환되면 숙청을 될 케이스였습니다. 숙청돼도 저는 돈도 모았고 노동자 생활로도 연명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자존심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 사회에서 누리던 특권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더구나 경쟁 관계에 있던 사람에게 경멸을 당하는 것은 죽기보다도 고통스럽지요.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당 간부들의 마누라까지도 대단한 경쟁 의식이 작용하는데 남편이 몰락하면 처자식도 같이 몰락하는 것입니다. 철저한 계급 사회에서는 숙청이 바로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숙청에 따른 모욕감으로 해서 완전히 병신이 되는 겁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이게 두려운 겁니다.』
金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분이 떨어지는 것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신분하락이 몇 배나 충격적인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金씨가 망명한 이유에 대해서 안기부는 해외출장중의 사업부진으로 金正日이 지시한 외화벌이 할당량 2백만 달러를 달성하지 못했고, 가짜 달러 지폐를 구입하라는 지시를 이행하지 못했으며 사업자금인 미국 달러를 축냄으로써 평양으로 돌아가면 자신은 처벌을 받고 교화소로 가족들은 탄광이나 집단농장으로 축출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발표했었다. 金씨는 처 송혜경(42), 장녀 원희(21), 장남 혁(20), 차남 명혁(14)을 북에 두고 있다. 부모는 사망했다.
당 비밀 강연, 이수근(李穗根)씨 매도
-李씨를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어릴 때 작은아버지 김택복(金擇福)(1976년에 사망)에게 양자로 입적됐습니다. 양아버지는 노동 신문당 생활부장, 논설위원 그리고 노동자 신문(북한 직업총동맹 기관지)편집국장을 지냈습니다. 이수근(李穗根)이 1960년대 초에 노동자신문의 주필이었고 아버님은 그 바로 밑에서 편집국장으로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평양의 문수리에서 살았는데 李씨를 만난 적은 없으나 아버님과 李씨가 함께 찍은 사진을 여러 장 본 것이 기억납니다. 李씨의 대머리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
김정민(金正敏)씨는 『이수근(李穗根)씨가 남한으로 탈출한 사실은 북한에서 일절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웃에 살았던 李씨의 가족이 수용소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어머니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은 1969년에 이수근(李穗根)씨가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 몰려 처형된 직후에 비로소 노동당 간부들을 상대로 한 비밀 강연을 통해서 李씨 사건을 지배층 사회에서만 공개하였다고 김정민(金正敏)씨는 말했다. 『저는 그때노동당 간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강연회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 강연 자료를 본 적은 있습니다. 「변절자의 말로는 이렇다」는 제목이 생각나는군요. 북한을 배신한 李씨가 남한의 정보부에 의해 이용만 실컷 당한 뒤 간첩으로 몰려 죽었다는 것이 강연의 요지였습니다.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탈출한 뒤에도 비슷한 강연이 있었는데 그때의 제목은 「그들은 도적놈들이었습니다.」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수근(李穗根)씨가 남한으로 탈출했을 때 김정민(金正敏)씨는 인민군특무상사로 근무 중이었다. 李씨가 한국을 탈출했을 때는 사회안전부 경비국 통신부 기술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李씨가 위장 귀순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웃을 일입니다. 북한이 심리전의 한 수법으로 김일성이 사망했다고 위장방송을 했다는 주장과 꼭 같은 논법인데 도대체 신과 같은 김일성의 위신을 더럽히는 그런 계획을 누가 짜겠습니까? 이수근(李穗根)과 같은 노동당 간부를 그런 식으로 위장 귀순시켜 간첩으로 써 먹자는 계획을 했다간 당장 목이 달아납니다. 노동당 간부의 배신은 김일성의 위신에 흠집을 내는 일이 아닙니까? 김일성의 위신이 손상되는 방법으로는 남조선 해방도 필요 없다고 할 이들인데…. 그리고 세상 천지에 얼굴이 백방으로 알려진 언론인을 간첩으로 내려보내는 짓을 누가 합니까. 』
金正敏씨는 『북한의 기득권 층에서 볼 때 李穗根이 진정으로 남한에 귀순했다는 데도 이용만 당하다가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니 남한으로 망명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고 했다. 그는 『그 뒤 북한의 고위층이 제3국으로 더러 달아났지만 남한으로는 단 한사람도 망명하지 않았던 것은 李穗根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고 단정하였다.
간첩이라면 기념관 만들었을 것
-그런 강연을 한 것은 이수근(李穗根)씨를 위장 귀순시켰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쇼였다고 보지 않습니까?
『왜 은폐를 합니까? 정보부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李씨는 金日成에게 충성을 다하려다가 순사한 셈인데 표창을 해야지요. 통일혁명당 지하조직을 남한에서 만들다가 잡혀 죽은 김종태와 같은 혁명 투사로 추앙해야지요. 북한의 혁명기념관에는 김종태를 기리는 진열실이 별도로 있고 서평양에는 김종태 사범대학이 있을 정도입니다.』
-신상옥·최은희씨를 홍콩에서 납치해간 북한의 공작선 이름이 「수근호」라고 하던데….
『허허…. 그것은 그 배를 기증한 조총련 실업가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
1심판결문은 李穗根씨가 한국을 탈출하기로 마음먹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남한 당국으로부터 북괴의 내막과 김일성을 폭로 규탄하는 취지의 강연지시를 받을 때마다 만약 정도의 한계선과 도수(度數)를 넘는 경우 북괴나 김일성으로부터 재기의 기회가 박탈될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이와 반대로 만약 동 내용대로 하지 않을 경우 대한민국으로부터 의심을 받을 것이라는 번뇌를 하게 되었다. 점차 자신의 신분이 폭로되고 있다고 감지한 피고인은 1968년 4월경에 이르러 신변안전 책을 위하여 한국을 이탈하여 홍콩 또는 캄보디아에서 북괴와 재 접선, 동 지령에 의해 새로운 공작을 취할 수 밖에 없다고 단정한 나머지…」
-이수근(李穗根)씨는 金日成을 직접 공격하는 강연이나 방송을 꺼려했다고 해서 위장간첩이란 의심을 받게 되었는데 金선생의 처지에서 李씨의 그런 태도가 이해 갑니까?
『그가 정말 위장간첩이었다면 과감하게 김일성 욕을 했겠지요. 그러나 처자식이 북한에 살아있는데 공개석상에서 김일성이 욕을 한다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저어하게 됩니다.』
李穗根씨의 金日成에 대한 생각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자료는 수사기록에 있다. 1968년 5월 초순 일자불상경 피고인가에서 서울시내로 가는 도중 차내에서 『중앙정보부 사람들은 내가 강연할 때마다 김일성을 욕하라고 하지만 욕할 것이 없으니 참 딱한 일이다. 한재덕(韓載德)과 같은 귀순자들은 말단에서 일하다가 잘못의 꾸지람을 듣던 사람이므로 김일성을 잘 모르고 있는데 그러면서 김일성에게 욕설과 불평을 하고있는데 내가 그런 자들과 같이 욕해야 한다니 한심한 일이다』라 하며… 북괴의 활동에 동조하고 …」
金日成 욕을 못할 이유
-이수근(李穗根)씨는 북한에서 엘리트로 생활하다가 남쪽으로 귀순해 보니 정보부의 말단 직원들로부터 지시와 감시를 받게 된 데 대하여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은데 李씨는 북한에서 어느 정도의 대우를 받았을까요.
『운전사가 붙은 벤츠나 볼보를 타고 다니고 어디가나 절 받고 살았을 겁니다.』그런 사람을 개 끌고 다니듯 이래라 저래라 하고 도청·미행·감시했다면 아마도 죽고 싶었을 겁니다. 李穗根이 위장 귀순했다고 주장하는 인사들은 그가 강연 내 기자 회견 또는 방송좌담 같은 자리에 나가서 金日成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삼갔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 홍필용(洪弼用) 당시 정보부 국장의 의견을 구했던 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위장 귀순했었다면 金日成이를 더 심하게 비방했을 것이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자존심이 대단하여 金日成이를 비난하는 원고를 주면 유치하다면서 그대로 하지 않았다.』
기자는 89년 5∼6월에 KAL858기 폭파범인 김현희(金賢姬)를 4일간 만나서 인터뷰 할 기회를 가졌었다. 金양은 안기부 수사관에게 범행일체를 실토한 뒤에도 반년 이상 金日成이를 부를 때 「김일성 주석님」이라고 존칭을 썼다고 한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金日成에 대한 외경심을 쉽사리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대포 침투 무장 간첩 이상규씨는 전향한 뒤에도 누가 金日成을 욕하는 것을 들으면 조건 部瑛岵막?반감이 치솟더라고 했다.
귀순자 신중철씨도 『귀순 후 2년이 지나서야 金日成 욕하는 소리를 들어도 뜨끔뜨끔 놀라지 않게 되었으며 이제는 나도 스스럼없이 金日成 욕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북한 주민들의 마음속에 있는 金日成은 신과 같은 존재이다. 기독교인이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예수님 욕을 할 수 없듯이 북한 사람들은 그 체제가 싫어 귀순했지만 金日成을 욕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북한 체제와 金日成과 주민들간의 이런 특수 관계를 잘 모르는 일부 정보부 직원들이 「金日成을 욕하지 않는 것을 보니 수상하다」는 단세포적인 발상으로써 李씨를 의심했다는데 李씨가 해외 탈출을 결심하게 된 이유의 하나가 있는 듯하다.
기자는 김정민(金正敏)씨를 발견함으로써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객관적 사실」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李穗根씨가 간첩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언들은 그전에도 많았다. 그의 사형 집행때 참여했던 신부는 『이수근이 당연히 「김일성 만세!」라고 외치며 죽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 의외라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당시 사형집행관여 검사는 이수근이 「나는 북쪽과 남쪽 체제를 다 경험한 사람으로서 중립국에 가서 통일방안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었다」는 취지의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그는 또 『이수근이 남한에서 감시를 당하는 등 자유를 속박당한데 대해 불만이 많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남의 증언+북의 증언〓진실
李씨를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에서 체포하였던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공사 이대용(李大鎔)씨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었다. 李씨는 체포된 직후 중립국에 가서 책을 쓰면서 살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李씨는 정보부의 지나친 감시와 비인간적 대우, 부부간의 애정 결핍, 그리고 자신이 겪은 남한 생활의 부자유스러움 등을 탈출 동기라고 이야기했다. 김형욱(金炯旭) 당시 정보 부장은 李공사에게 『이수근이가 빨갱이는 아니지만 탈출했다가 잡혔으니 사형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보안에 조심해 달라.』는 취지의 당부를 한 적이 있다.
李씨의 소지품 중에 이것은 중립국에서 생활하는 데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영한사전·한영사전·기초영문법 등의 참고서가 있었다. 李穗根써의 해외 탈출 사건을 수습하는데 관계하였던 정보부의 한 간부는 잘라 말했다. 『그가 홍콩까지 탈출하는데 성공한 뒤 굳이 캄보디아까지 가려고 했다는 것이 북한으로 가려는 뜻이 없었다는 증거다. 북한으로 가려면 홍콩에서 바로 구룡반도를 통해 중공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쫓기는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뭣하러 프놈펜까지 가려 했겠는가』
물론 『이수근(李穗根)이 위장 귀순한 간첩이었다』는 주장을 계속하는 이들도 있었다. 李씨를 수사하여 교수대로 보냈던 당시 정보부 수사국 간부 등이 그러하였다. 이런 「주장」과 「반대 주장」은 남한에서만 이루어졌다는 허점이 있었다. 이 사건은 남북한 걸쳐서 일어난 것이며 李씨가 간첩이었느냐, 아니냐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북한 노동당이라는 점에서 북한측에 대한 취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김정민(金正敏)씨의 발견은 그런 점에서 나머지 반쪽의 진실을 더 찾아 온전한 진실을 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기자에게 가져다 주었다. 더구나 金씨는 李씨 이후 남한으로 망명한 최고위급의 노동당 간부인데다가 여러 가지 조건에서 李씨와 흡사한 경험을 하고 있다. 이 金씨의 경우를 실마리로 삼으면 죽은 李씨의 심리상태도 쉽게 추리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수근(李穗根)씨를 이해하는데는 그가 기자였다는 점을 열쇠로 삼을 필요가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기자란 직업은 비록 그가 공산주의 체제하의 기자라 하더라도 그 사회에서 가장 자유분방하며 행동의 자유 폭이 크게 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 자유를 느끼는 데도 보통 사람보다는 민감한 법이다. 李穗根씨가 남한에 와서 겪은 최초의 좌절도 그의 이러한 직업 근성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안남규(安南奎)씨(56)가 1차적인 증언자이다. 기자는 89년 3월의 기사 뒤에 그를 만났다.
수기판매금지의 쇼크
안(安)씨는 1968년 1월부터 석달간 李씨의 구술을 토대로 하여 「장막을 헤치고」라는 李씨의 책을 만들었던 출판업자이다. (지금은 안전교육관계의 일에 종사하고 있다) 정보부의 허락을 받고 安씨는 구술정리 작가를 동원, 68년 4월에 책을 출간하였다. 1만 부를 찍어 시판하기 직전에 김형욱(金炯旭)정보 부장이 판매금지와 동시에 폐기 지시를 내렸다. 安씨는 이 책 한 권을 보관하고 있다가 지난해 재 출판했다.
이 책은 북한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인데 문제가 된 것은 「북괴는 朴대통령이 정보기관을 동원하여 부정선거를 꾀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는 취지의 문장이다. 李씨는 기자특유의 객관적 기술법으로써 북한의 선전·선동을 예시한 것인데 정보부에선 이 정도의 표현도 허용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기자가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해서 공개 금지가 돼 버릴 때이다.
安씨에 의하면 李穗根씨는 이 사건 이후 극도로 풀이 죽었다는 것이다. 흥이 나서 구술을 하던 때와는 달리 李씨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남한이 자유롭고 살기 좋은 나라이지만 권력기관이 너무 국민을 억압하고 있다.』『감찰실은 무서운 곳이다』는 따위의 이야기도 자주 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재 출간 된「장막을 헤치고」를 읽어 보면 글쓰는 직업인으로서의 李穗根씨의 「의욕」을 느낄 수 있다.
귀순자들의 상투적인 반공 수기가 아니라 공산주의의 모순을 논리적으로 분석·비판한 일종의 논문이다. 李씨는 나중에 이질인 배경옥(裵慶玉)씨에게 한국을 탈출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중의 하나로서 『남북한 체제를 모두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통일에 관한 책을 제3국에서 자유롭게 쓰고 싶다』고 말했었다. 이는 남북한 양쪽에서 언론의 규제만 겪은 기자로서의 본능적 욕구가 아니었을까.
「장막을 헤치고」의 문제부분을 인용한다. 「그러니까 내가 대한민국으로 탈출하기 2개월 전의 일이다. 남한에서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를 석 달 앞둔 1967년 1월말, 북괴 중앙당 문화부에서는 대한민국을 5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평양에 있는 각 신문사 주필들을 불러놓고 주필 회의를 열었다. 나도 그 회의에 참가했었는데 그때 그들의 얘기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남한에서는 이번 선거를 통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당선시키려고 공화당과 중앙정보부가 짜 가지고 몇 해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준비와 태세를 갖추기 위하여 남한의 집권자들은 이미 모든 도시를 비롯하여 벽촌에 이르기까지 정보망 체계와 공화당 조직체를 통하여 많은 선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화당과 정보부의 공작을 비방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는 공무원이 있으면 그들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심지어는 통장, 반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갈아치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한 정권 즉 그들은 군사 정권이라고 하는데 남한의 군사 정권에서는 지방 행정기관과 긴밀한 종적 연결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으며 혈연 관계 및 종친관계, 그리고 공화당에 충실한 자를 동원하여 음성적인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집권당의 사전공작에 반하여 야당은 파벌싸움으로 뭉쳤다 갈라졌다하여 번잡스럽기 짝이 없어 선거 태세는 엉망이라는 것이다.(중략) 그들은 박정희 후보의 재선은 거의 확정적인 것으로 내다 보면서 그 이유는 박정희 후보가 인기가 있다든지 정치를 잘했기 때문 이라기 보다는 철저한 정보망과 공화당 조직의 확대 강화로 세력이 커졌기 때문이며 더구나 야당에 대한 정보부의 풍화 작용으로 군사 정당의 후보들이 난립하고 있다는 것과 미국이 현 집권층을 지지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박정희 후보의 재선은 움직일 수 없는 기정 사실이라는 것이다.」
경직된 반공 이데올로기
「장막을 헤치고」의 전편을 흐르고 있는 북한체제 및 金日成비판의 강도에 비추어 볼 때 아무런 문제가 될 것도 없는 이런 대목 때문에 수기가 판매 금지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1968년 1월 12일의 청와대 습격 기도 사건 석달 뒤에 이 수기가 완성되었다. 그때는 남북간의 긴장이 휴전 이후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남한의 사회 분위기도 굳어 있었다. 1심판결문에서 李穗根씨가 북한을 고무·동조·찬양했다고 하여 국가보안법위반사실로 예시되어 있는 대목들 중에서도 북한에 관한 객관적 사실을 말한 것이 많아 당시의 경직된 반공 이데올로기를 알 수 있게 한다.
「『김일성은 농촌부락을 다니면서 막걸리 잔을 나누기도 하는 서민적 인간이다』라고 하여 북괴의 선전노선에 동조하는 한편 김일성을 찬양하고 ….」
「1·21사태에 관한 뉴스를 듣고 『청와대 앞이라면 박정희 코앞까지 온 거야. 경찰이나 군인들은 부정·부패에만 눈이 어두워 이렇게 망신하는 거야. 이북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무장 봉기하여 청와대를 습격하였다고 전세계에 발표할 것이다. 북한 인민들의 사기가 돋아 오를 것이다. 金日成은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있다』고 하여 북괴의 역선전 내용을 고무·동조하고 …」 「『나는 이북에서 부사장으로 있을 때 번역사에게 번역을 시키면 그는 두 시간 내외로 김일성에게 보고할 수 있도록 빨리 번역하였다』고 하여 북괴가 행정질서의 신속성을 선전하고 있는데 동조하는 동시에 찬양하고 …」
「『평양시내에는 가로수가 과실나무로 되어 있어 아름답다. 평양의 전차는 발달되어 있다』고 하여 북괴가 그 발전상의 허위·선전하고 있는데 동조·찬양하고 …」 「『이북의 여배우는 남한과 같이 화장을 하지 않고 수수하게 좋다』고 하여 북괴의 허위·선전에 동조하고 …」 「『남한 국민이 민주주의를 지지하듯이 북괴 인민은 공산주의 지지하고 있다』고 하여 허위·선전에 동조하고 …」
해괴한 암호문
안남규(安南奎)씨는 「장막을 헤치고」가 판매 금지돼 손해를 보게 되자 정보부에 건의하여 이번엔 「이수근(李穗根)자선전」의 제작권을 얻었다. 이 자서전 원고는 李씨가 탈출하기 직전에 완성되었다. 이 두 차례의 공동 작업을 통해서 安씨는 李씨와 가까워졌다. 安씨는 『아마도 李씨와 가장 허물없이 지냈던 사람이 나일 것이다』고 했다. 이 安씨가 전하는 李씨의 인간적 면모를 듣고 있노라면 「李穗根씨야 말로 전형적인 기자 생리를 가졌던 사람이다」는 실감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이었다. 깐깐하고 분석적이며 오기가 세면서도 솔직한 李씨를 두고 한 정보부 간부(당시)는 『그 성격 때문에 북한을 탈출했고 그 성격 때문에 남한에서까지 탈출했다가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는 표현을 하였다.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쓸 때 그의 이질 배경옥(裵慶玉)씨는 광주 교도소에 있었다. 裵씨는 이모부인 李씨에게 위조 여권 브로커를 소개해 주었고 홍콩∼사이공까지 동행하였다가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 죄로 무기 징역형을 확정 받아 20년 11개월을 복역한 뒤 감형을 받아 1989년12월에 출감했다. 31세의 젊은이로 구속돼 51세의 초 늙은이로 바깥 세상에 다시 나온 것이다. 기자가 裵씨를 만나면 제일 먼저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李씨가 써준 암호문을 정말 모스크바로 부쳤습니까?』재판부가 李穗根씨가 간첩이었다고 단정하여 사형선고를 내리는 데 있어서 유일한 물증은 이 암호문이었다. 그 이외의 혐의는 자백이나 정황일 뿐으로서 공정하고 자유로운 수사 분위기가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면 증거 능력을 상실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
이 암호문의 진실성이 뒤집어지면 유죄를 인정하기가 어려운 구조를 가진 사건이었다. 문제의 암호문에 대해 1심 판결문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1968년 5월 3일 피고인은 자가(自家)에서 이질인 배경옥에게 사상 교육을 시키면서 암호문을 모스크바 주재 북괴 대사관을 경우 북괴에 전달되도록 우송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다음날 5×9㎝의 백지에 만년필로 작성하였다. 동 암호문을 서울서 홍콩까지 정상적 조직원이 아닌 배경옥에게 소지시켜 보내는 것이므로 그 발각을 우려한 나머지 단순히 남하한 자가 고향의 부친께 보내는 편지인양 문맥을 가장할 목적으로 『배은망덕하고 고향을 떠난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라 했다.
이어서 접선 지도원을 보내 달라는 취지로 『여기에 약을 구해 놓았으니 인편을 보내주시오』라고 한 다음 1·21 무장공비의 남침에 대한 보복 조치에 대해 대책을 강구하라는 취지로서 『지난 정월에 그곳에서 여기에 보낸 선물의 답례로 무엇을 보내려고 하는데 그것을 받지 마시오』라 하고 김일성의 사택을 5호댁이라고 칭하는 것이 관례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수신인은 『당중앙위원 5호댁』이라고 기재하였다. 이 암호문을 한영양문(韓英兩文)성경책의 표지 후면에 삽입, 배경옥에게 교부하였다. 배경옥은 5월 5일 오후 5시 CPA비행기편으로 김포공항을 출발, 홍콩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배경옥은 암호 연락문이 든 성경책을 포장한 후 관광객 안내원인 성명 미상 중국인에게 대서료 및 우편료를 지불하고 수신처를 이수근의 지시대로 소련 외무성 또는 모스크바 주재 북괴대사관으로 기재하면 당국의 의심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하고 성경책이 한글판이라 모스크바 주재 신부 앞으로 발송하여도 반드시 북괴대사관에 조회·전달되리라 판단한 나머지 동 중국인으로 하여금 영문으로 발신인을 홍콩 이하 미상지 위 중국인명의로, 수신인을 소련 모스크바 중앙 천주교회 신부로 기재케 한 후 구룡 우체국에서 국제 소포로 발송하였다.
가치 없는 물증
이 내용만 읽어봐도 몇 가지의 문이 생긴다.
최고급 간첩이란 자가 金日成한테 직접 암호문을 그것도 우편으로 보낼 수가 있나?
그 중대한 암호문을 모스크바 중앙 천주교회로 보내면 그곳에서 알아서 북한 대사관에 전달해 주지 않겠느냐는 짐작만으로 중앙 천주교회로 발송했다니 이건 세 살 먹은 어린이가 할 행동이다.
배(裵)씨는 1990년 3월호 월간 조선에 기고한 수기(「나는 간첩이 아니었다」)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이수근을 처음 만난 것은 1968년 4월이었다. 인사만 나누었고 나는 그 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5월 5일 사이공으로 돌아갔었다. 중앙 정보부는 안면만 익힌 이 첫 만남을 두고 『68년 4월에 일시 귀국한 배경옥과 만나 북괴와 접선할 것을 모의 기도했다고 했다.』 아무리 능한 간첩이라도 그 짧은 순간에 다른 가족들이 있는 집안에서 그것도 처음 보는 나를 설득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앙 정보부의 주장대로 내가 홍콩 구룡반도 우체국에서 암호문이 들어있는 성경책을 우송했다면 홍콩우체국에 발송 근거가 명기되어 있었을 것이고 중정은 보다 명확한 증거를 위해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암호문을 우송했다면 그 근거가 남아 있지 않겠느냐』고 묻자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부르는 대로 받아쓰고 묻는 것만 대답하라』며 고문을 계속했다.」 배(裵)씨는 또 공소사실대로라면 이수근이 그 암호문을 작성한 것은 5월 4일 오후 6시였다는데 내가 김포공항을 떠난 것은 그 다음날 오전이었다. 만 하루가 안 되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이수근을 만난 일이 없고 전화조차 받은 적이 없다」고 썼다.
수사 재판 과정에서 암호문의 내용만 인용되었지 그것의 실재(實在)를 뒷받침할만한 발송 근거 서류등 아무런 증거도 게시되지 않았으므로 암호문은 물증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의 문제
이수근(李穗根)씨가 한국을 탈출하게 된 한 원인은 북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걱정과 미안감 때문이었다는 게 배경옥(裵慶玉)씨의 견해다. 『1968년 12월경 그러니 이모부가 탈출하기 두 달 전이었습니다. 이모부가 놀러 오라기에 그 집에 갔더니 집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모부가 불쑥 「여행사에 부탁하면 여권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물어요.「여행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아니야, 여기서 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하면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몇 번 만나는 과정에서 이모부가 중앙정보부 감찰실로부터 여러 번 수모를 받았고 괴로움을 술로 삭이며 지내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늘 취해 있었습니다. 때로는 구타를 당하고 권총으로 쏴 죽인다는 협박도 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부생활도 감시를 당하고….
자유를 찾아 귀순했는데 남한에서도 그 자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1968년 9월에 반도호텔에서 이강월(李江月)씨와 결혼식을 올렸지만 귀순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당국에서 결혼을 권하므로 자신도 그렇게 하는 것으로 생각할 뿐 인륜대사로 인식하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북에 처와 자식 셋을 두고 온 사람이 아닙니까? 이모부는 「중립국에 갈 수 있으면 좋은 방법이 생길 것이다」고 했습니다. 「나는 북한과 남한 사회를 모두 경험한 사람이다.
양 체제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 그러면 북한과 남한 정부 모두가 나에게 접근해 올 것이다. 그럴 때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을 보내 달라면 보내 줄 것이다. 남한은 남한대로 좋은 조건을 제시할 것이다. 살기는 남한이 좋으니 그때 다시 돌아오면 되지 않겠는가.」 나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고통받고 있는 이모부를 돕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났어요. 그때 이모부가 북한으로 가자고 했다면 내가 제일 먼저 경찰에 신고했을 것입니다.』
안남규(安南奎)씨에 따르면 李穗根씨와 李부부사이의 정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호칭도 「李선생」 「李교수」식이었다. 그럴수록 이수근(李穗根)씨의 가족생각은 더욱 깊어졌으리라. 술집에서 「고향이 그리워도」를 부르면서 눈시울을 붉힌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통일이 될 때까지 돈을 많이 벌어 『통일이 된 다음 가족과 함께 잘 살아 보겠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는 것이다. 귀순자들이 남한으로 넘어가기 전에 가장 고민하는 것은 가족의 안위다.
자신은 자유를 얻을지 모르지만 그로 해서 가족이 수용소로 보내어지는 따위의 고생을 해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칠 때 여간 모진 성격의 사람이 아니면(또는 자신의 처지가 여간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결심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귀순자들의 공통점은 가족에 대한 변명을 스스로 만들어 둔다는 것이다. 동구권에서 유학 중 남한으로 망명해 온 대학생들 중에는 『어차피10년 이내로 통일이 될 테니 그때까지만 고생하면…』 하는 식으로 자기 변명을 만들어 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정보부장 앞 편지」맡기고
이수근(李穗根)씨의 경우에는 어떤 자기 변명을 만들어 두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제3국으로 가 살면서 가족을 빼내오는 방법을 생각했던 것 같다. 재미있는 사실은 李穗根씨처럼 처와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북에 두고 온 김정민(金正敏)씨도 李씨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는 점이다. 『저도 남한이 아닌 제3국에 가서 살려고 했습니다. 제3국에서 국제 인권 단체를 통하여 가족들의 보호를 요청하려고 했습니다. 가족문제가 여론화되면 통제 구역에 가 있는 내 가족이 그래도 사회 복귀가 가능한 개방구역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그랬는데 한국 공관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그만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가족 생각에 지금도 괴로워하십니까?
『참, 인간도 짐승과 결국 다를 바 없더군요. 처음에는 도저히 못 살 것 같았는데, 요사이는 가족 생각 별로 안하고 이렇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찍 눈을 뜨면 가족 생각이 나고 텔레비전에 이런 이들이 등장하면 자식 생각이 나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이수근(李穗根)씨는 월남하여 생면 부지의 친척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악연 때문에 여러 사람이 고생했다. 김세준(金世埈)씨(45)도 그런 경우다. 李穗根씨의 누님의 아들인 金씨는 연세 대학생으로서 李씨 집에서 함께 기거하다가 탈출을 방조한 죄로 구속 기소돼 징역 5년형을 살고 나왔다. 지금은 부산에서 보험 모집업에 종사하고 있다.
김세준(金世埈)씨에 대한 공소사실로서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수근(李穗根)피고인은 金피고인에게 사신(私信) 세 통을 줄 터이니 내가 떠난 후 발송하라. 신민당 유진오 당수에게도 쓰려고 하였는데 미처 쓰지 못했다. 해외에 나가서 써 보내겠다고 지시하였다」기자는 1989년 3월호 월간조선에 문제의 기사를 쓴 뒤 김세준(金世埈씨)씨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추가로 확인하였다. 李穗根씨는 김포공항을 통해서 탈출하던 바로 그 날(1969년 1월 27일)북창동의 어느 여관에서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 앞」으로 된 편지를 써 金世埈씨에게 맡기면서 『내가 비행기를 탄 뒤 우체통에 집어넣어라』고 시켰다.
金씨는 김포공항에서 李씨를 전송한 뒤 서울시내로 들어와 미아동 근방의 우체통에 편지봉투를 집어넣었다. 기자가 당시 金炯旭부장의 비서실에 근무했던 한 간부에게 확인했더니 그 편지는 배달이 되었으며 내용은 감찰실을 비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李씨가 정말로 북한에 가려고 했다면 정보부장 앞으로 편지를 써놓고 갔을까? 정보부는 탈출 첫날에는 李씨가 국내로 도망했는지 해외탈출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을 때여서 李씨의 편지는 자신의 탈출을 정보부에 자진 신고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추측컨대 李씨는 자신을 평소에 아껴준 金炯旭부장에게 인간적인 배려를 한 것이며 제3국으로 도망한다는 것을 큰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李씨를 사이공서 붙들었던 이대용(李大鎔)씨(당시 주월 한국대사관공사)도 『그는 한 2∼3년 징역을 살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가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북한정보기관의 심리전
李씨에 대한 정보부의 관리나 감시가 부적절한 것이었다는 증언은 많다. 북한 언론계의 거물을 반공 강사정도로 활용하고 집요한(그러나 李씨가 눈치챌 만큼 서툰)감시를 했다. 그때 이수근(李穗根)씨를 감시하는 임무를 지고 있었던 것은 중앙정보부 감찰실이었다. 당시 실장 방(方)모씨(현재 미국거주)는 1989년에 「주부생활」에 기고한 글에서 감시 방법을 구체적으로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이수근의 집 맞은 편에 2층 건물을 물색, 전세를 얻어 수사관을 그곳에 상주하게 하였다. 주 야간용 적외선 망원경, 특수 카메라 등의 장비를 동원, 이수근의 행동 하나 하나를 포착했다. 전화국 직원으로 가장한 수사관이 이수근의 집안으로 들어가 전화기 속에 감쪽같이 도청장치를 가설해 놓았다. 그의 승용차 안에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전자음을 최대한 제거할 수 있는 특수 소형 마이크를 설치했다.」
1968년 12월 18일자 경향신문의 사회면 「돋보기」란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요즘 신문사에는 『이수근(李穗根)씨가 자살했다는데 사실이냐』는 문의가 귀찮을 정도로 오고 있다. 이런 괴 전화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주로 하오 늦게 걸려오며 상대방은 신원을 밝히지도 않고 끊어버리기가 일쑤인데 장본인인 李씨는 17일 하오 2시 인천 진성여중 교정에서 한시간 동안의 열띤 반공 강연을 해 항간에서 떠도는 이런 유언비어를 뒤집었다.」 첩보세계의 고전적인 수법 중 하나는 배신자를 적의 손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북한 정보 당국이 이수근(李穗根)씨에 대하여 비슷한 수법을 쓴 것이 아닌가하는 추리가 가능하겠다.
남한내의 간첩들을 동원하여 『이수근(李穗根)이 수상하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그러면 한국 정보부가 신경과민상태가 돼 李씨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 이번에는 李씨가 자유를 속박 당해 갑갑증을 일으킨다. 그래서 한국을 탈출하게 되고 당황한 정보부는 李씨를 붙들어와서는 간첩으로 몰아 처형해 버린다. 이런 가상이 사실이라면 우리 정부기관은 북한 정보 기관의 심리전에 넘어간 셈이 된다. 시기적으로도 이런 추리가 전혀 황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의 「돋보기」기사에서 보듯이 이수근(李穗根)에 대한 유언비어가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조작된 시기와 李씨에 대한 정보부의 감시가 강화된 시기, 그리고 李씨가 한국 탈출을 결심한 시기는 1968년 12월경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사과정은 조작과정
기자의 추가적인 취재에 의해 이수근(李穗根)사건 수사·재판은 피고인들이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분위기는 피고인들의 감옥 생활 중에도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서 배경옥(裵慶玉)씨의 증언만 소개한다.
「조사과정은 바로 조작과정으로 통했다. 나는 다만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기만 하면 됐고 이것이 바로 나의 자술서가 되었다. 조사관이 『이렇게 했지』하고 물으면 『아니오』란 답변에 돌아오는 것은 물리적 고통밖에 없었으므로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사실대로 말한 것도 이모부가 달리 대답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하면 나는 『그렇다면 그것이 맞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콘크리트 바닥에 물을 뿌리고 야전용 전화기를 돌리는 전기 고문, 구타 등은 한 번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그만이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그들이 교대로 돌아가며 잠을 재우지 않은 것이었다. 책상의 작은 흠집 하나, 무늬 하나가 꿈틀거리는 뱀이나 맹수처럼 헛것을 보게 되는 환각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에서 인생의 애착은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귀찮은 것이었다. 후일 나는 정신 이상이 그러한 상태에서 시작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조사 받는 대상은 배경옥이란 인간이 아니라 단지 조작대상으로 지목된 물건에 불과했다.
당시의 나는 형량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조사만 빨리 끝나면 죽음이라도 좋았다. 중앙정보부 수사관은 『대한민국은 3부가 아니라 4부이다. 그중 중앙정보부가 최 상위다』고 공공연히 사무실에서 이야기할 정도였으므로 그곳에서 진실이 통용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자체가 잘못이었다. 서대문 구치소로 넘어 온 뒤에도 검사가 검찰청으로 우리를 부른 것이 아니라 구치소로 직접 찾아와서 취조했으나 취조라고 해도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조서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곳에까지도 중앙정보부 요원이 입회하여 들락거리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의 의견서가 서류에 첨부되는데 그 의견서에 형량까지 쓰여져 있는 것을 읽어보았다. 재판받기 전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공소 사실을 그대로 시인하라는 협박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대법정 2층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정보부요원인 것을 즉시 알아보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었고 공포감은 법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무조건 『예, 예』하였다.
사법부 역시 진실을 밝히려는 성의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구속 당시 가족으로는 어머님과 막내 누이 동생, 처와 장남, 장녀를 두고 있었다. 처는 내가 대전에서 광주로 이송될 때까지 극진하게 옥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러나 1973년 11월부터 사식이 끊어진 것은 멀리 광주로 이송되었고 자라나는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하기 때문이라 믿는다. 「간첩의 가족」이라는 굴레가 일가 친척까지 확대되어 얼마나 큰 고통이 되었을까 짐작 만 할뿐이나 실제적으로 어떻게 괴롭혔는지 뒤에 밝히겠다.
지금 나의 몸은 중앙정보부에서 받았던 고문의 후유증으로 무릎 관절 통증은 말할 수 없다. 수감중 구타를 당하여 좌측견갑관절탈골상을 입고 수술을 받았으나 어깨는 기형이 되어 버렸고 수술 후유증으로 견갑관절의 동통은 가실 날이 없으며 날씨만 흐려지고 기압이 낮아지면 더욱 전신이 쑤셔서 고통이 심하다.
전향 무효 청원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온 몸이 전율하면서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의 변화가 오는 증상이 나타난다. 옥중에서 복부 내 종양을 얻어 지금도 치료를 받고 있다. 안동에서 출감한 후에 안동교도소에 보관된 종양 관계 엑스레이 필름과 의사 소견서를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 진료자료는 내가 광주에 수용 중 자비로 일반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 광주교도소 의무과에 보관되었던 것을 안동 교도소에서 다시 심하게 발병하자 내가 직접 서신으로 광주 교도소에 연락, 부송하여 줄 것을 요청해 받았던 것인데도 웬일인지 안동 교도소에서는 거부하고 교부하지 않았다.
자기의 돈을 주고도 소유권을 잃어야 되는 법도 있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해도 이럴 수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교도소 당국의 전향 권유에 대해 나는 애당초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전향을 하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거부하였다. 교도소 당국에서는 일단 국가 보안법으로 형이 확정된 이상 전향을 하여야 빨리 석방될 것이라고 말했다. 1970년 7월 나는 전향서를 제출했고 전향이 확정되었다는 통고까지 받았다.
전향서를 쓰기까지 받게 되는 회유, 기만, 구타, 고문 등의 비인간적인 행위는 접어 두더라도 전향서의 궁극적 목적은 공안수를 국민의 일원으로 복귀시키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사건의 조작이나 수사·재판 등의 과정에서의 고문과 모순을 정당화하기 위한 요식적 절차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리관 속의 자유인
「나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 이러한 제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결연히 거부하는 것과 동시에 옛날에 제출한 전향서가 원인 무효임을 청원하였다. 왜냐하면 본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나마 건전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겠다는 나의 뜻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원서를 작성하여 법무부장관 앞으로 우송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발송하지 않고 있어 1989년 4월10일부터 단식에 들어갔다.
나중에 쇠약해져서 주사를 맞으라고 하는 것도 거절했더니 그럼 누워서 안정만 하라고 권유해서 의무과에서 누워서 지냈다. 모두 10일간 단식했으며 법무부장관의 답변을 4월 말일까지 받아 볼 수 있도록 약속이 되어 복식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1989년 5월16일자로 안동교도소로 이송된 것이다.
1989년 5월15일 광주교도소에서 나는 노태우대통령을 수신인으로 하는 사신을 보내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안동으로 이감된 후 1989년 11월22일에 법무부 순열관을 청원 면담한 자리에서 전향서의 의미와 목적, 공안사범의 차별적 처우에 대한 불복이 있음을 청원했으나 법무부장관의 서면답변서를 받아보지 못하고 1989년 12월22일 형기만료로 교도소를 나왔다. 교도소에서 21년만에 나오는 날 새벽에 경찰관리 2명이 나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나오는 것인지 들어가는 것인지 감정은 오히려 불쾌하기만 했다. 경찰관과 함께 관할경찰서에 가서 보호관찰대상자로서의 절차를 간단히 마친 후 집으로 갈 수 있었다. 홍콩 경찰서에 의해 억류된 때로부터 만20년 11개월의 구금생활이 종식되었다. 권력을 움켜쥔 자들에 의해 한 인간의 삶이 무참히 짓밟힌 것이 부족하여 보호관찰이란 딱지가 계속 붙어 다녀야 하는 현실이 존재하는 한 온전한 자유인은 아니며 아마도 평생 유리관속에 있는 자유인이 될지 모르겠다.」
인간의 운명은 사소한 사건으로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 수가 있다. 배경옥(裵慶玉)씨가 그런 경우였다. 그는 월남에서 크레인 정비 기술자로 취업해 있었다. 일시 귀국하여 있던 1968년 8월22일 지인(知人)이 홍콩으로 출국하는 것을 공항까지 동행하여 전송하다가 택시 안에 여권이든 소 가방을 놓고 내렸다. 裵씨는 8월27일자 동아일보에 분실광고를 냈으나 여권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권 재 발급의 수속을 밟고 있던 중 이수근(李穗根)씨로부터 위조여권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20여년 간의 감옥생활에 이르고 만 것이다.
裵씨는 출감한 뒤 또 한번의 비운을 겪어야 했다. 옥중생활 중 소식이 끊긴 전처(前妻)를 찾아갔는데 전처는 裵씨가 아이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 아들 휘훈군(25)은 대학졸업을 앞두고 취직을 준비중에 있었고 딸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전처는 자녀들이 충격을 받을 까 두려워했던 것 같은데다가 1990년 8월 휘훈군은 첫 봉급을 탄지 며칠 안되던 날에 무주구천동의 계곡에서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급사해 버렸다. 裵씨는 21년만에 네 살 된 아들이 시체로 변한 것만 보게 된 셈이다. 裵씨는 지금 전처와 재결합하는 문제를 놓고 의논중이라 한다.
국가가 이렇게 매정해서야
배(裵)씨는 지금도 옥중이야기나 수사·재판 받던 이야기가 나오면 갑자기 흥분증세를 보이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裵씨는 여러 번 만나 본 기자의 느낌으로는 「경우가 바른 서울토박이」이다. 裵씨가 이모부를 위해 위조여권을 알선해 주고 불법 출국을 도와준 것은 분명한 위법이었다. 그러나 그 죄가 인생의 황금기인 30대와 40대를 옥중에서 다 보내야 씻어질 만큼 엄청난 것이었을까.
이수근(李穗根)씨 사건을 취재하면서 이 사건과 연루된 많은 보통 사람들이 국가와 법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이름 아래서 인생이 망가진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면서 기자는 『국가라는 것이 이렇게 매정해서야…』하는 느낌을 절로 갖게 되었다. 한국 사법사상 유래가 드문 일이 이수근(李穗根)사건에서 있었다. 1969년 5월10일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항소만료 기간인 5월17일이 지나도록 항소하지 않아 사형이 확정되었다.
李씨는 그때 서울 구치소 특별감방에서 교도소직원이 아닌 정보부 직원의 감시하에 있었다. 항소 뜻이 있었다 하더라도 정보부의 허가 없이는 법원에 전달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李씨는 1969년 7월2일 오전에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그때 공범인 배경옥(裵慶玉), 김세준(金世埈)씨들에 대한 재판은 고등법원에 계류 중이었다. 공범의 재판이 진행중인데 주범을 먼저 사형시켜버린 예는 문명국에선 절대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정말 위장 귀순한 2중 간첩이었다면 KAL858사건의 김현희(金賢姬)처럼 대단한 선전가치가 있어 살려놓고 활용할 수 있었을 텐데 사법의 관행을 무시하고 왜 서둘러 사형시켜 버렸던 것일까. 김형욱(金炯旭)이 이대용(李大鎔)씨에게 했다는 말대로 이수근(李穗根)씨의 입에서 진실이 튀어나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
이제 결론을 내릴 때다. 이수근(李穗根)씨가 진정으로 귀순한 것이 북한이 아니라 중립국에 가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한국을 탈출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게 하는 수많은 증언과 정황이 이제 기자의 손에 들어 있다.
李씨가 판문점을 탈출할 때 북한 경비병이 조준 사격을 하지 않고 일부러 하늘을 향해 쏘았다는 의심은 판문점의 사정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李씨의 귀순 상황을 시종일관 목격하여 특종 보도한 당시 동양방송의 김집 기자(현재 KBS 국제방송국 근무)는 공동경비 구역 안에서는 쌍방간 시설물 공격을 하지 못하게 돼 있어 북한 경비병이 李씨를 쏘았다면 그 즉시 UN측 경비병의 보복사격을 받았을 것이다고 했다.
북에서 李씨의 가족은 숙청되고 그는 변절자로 낙인 찍혔다.
李씨가 보냈다는 암호문은 그 실재實在)를 믿을 수가 없다.
李씨는 이틀간이나 홍콩에서 행동이 자유로울 때 중공으로 넘어가지 않고 굳이 중립국으로 가려고 했다.
李씨는 탈출하면서 탈출을 알리는 편지를 정보부장에게 부쳤다.
金炯旭은 李씨가 빨갱이가 아니지만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李씨는 사법적 관행을 무시하고 서둘러 처형되었다.
李씨는 유언에서 간첩임을 부인했다.
수사 재판과정에서 피고인의 자유가 전혀 보장되지 못했다.
이런 사실들은 이씨가 간첩이라는 주장을 뒤엎는데 있어서 지엽적인 이견이 아니라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 반증들이다. 이런 사실들의 무게로 해서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의 인용부호는 이제 걷어 치워야 할 때다. 李穗根씨는 간첩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는 무엇이었나.
李穗根씨와 최인훈(崔仁動)씨의 소설 「광장」(1960년 초판)에 나오는 주인공 이명준(李明俊)은 서로가 서로의 모델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로 흡사하다. 나이도 비슷하고 기자란 직업도 같으며 남과 북에서 똑같이 실망하여 중립국 행을 택했다가 죽음을 맞은 것까지 같다. 그러나 죽음의 방식은 달랐다. 李明俊은 중립국 행 배에서 바다로 투신 자살했고 李穗根은 타살(他殺)이었다. 崔仁動씨는 『자살한 李明俊보다는 중립국에 가서 글을 쓰려고 했다는 李穗根씨가 더욱 지식인다운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고 했다.
이수근(李穗根)씨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은 「남과 북의 체제를 다 경험하여 양쪽 체제의 문제점까지 알게 된」 기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진실을 쓰고 싶은 욕망」이다. 李씨가 중립국에서 쓰려고 했던 글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다같이 비판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사회주의에 더 불리한 글이 되었을 것이다.
李씨는 사이공에서 붙잡혔을 때 이대용(李大鎔)공사에게 울면서 『북한은 인간이 살 수 없는 생지옥이지요. 그러나 남한에서도 자유가 없었어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李穗根이 남긴 글·말·행동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것은 남한 사회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으나 결코 북한 체제에 미련을 갖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탈출하여 쫓기면서도 그는 홍콩에서 손쉬운 북한 행을 거부하고 위험한 중립국 행을 고집했다가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몸으로 부딪쳐 냉전시대의 진실을 체득한 사람으로서 이수근(李穗根)씨는 중립국에 정착, 글을 무기화 하여 가족을 데려오고 돈도 벌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존재증명을 하고자 생명을 건 승부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양쪽 체제의 문제점과 냉전시대의 암부(暗部)를 극적으로 노출시킨 李穗根씨는 펜이 아닌 온 몸으로 생생한 고발 기사를 쓴 셈이다. 그가 감행한 남과 북으로부터의 두 번의 탈출은 다 자유와 관련된 행동이었다. 남과 북의 체제가 모두 이 오기 센 지식인이 갈구하던 자유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였다.
자유를 구경만 하다가…
그러나 동구·소련의 공사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있는 지금 이수근(李穗根)씨와 비슷한 처지의 김정민(金正敏)씨는 이제는 거의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남한에서 행동하면서 李穗根씨는 엄두를 낼 수 없었을 입 바른말도 많이 하고 있다. 李·金 두 망명자의 차이는 달라진 남한 사회의 희망을 상징한다.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어느 참석자가 말했듯이 『북한에는 미친놈들만 살고 남한에서는 썩은 놈들만 살아서 큰일이다』고 하지만 남한 사회는 그 썩은 부분을 지적하고 교정할 수 있는 자정 능력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배경옥(裵慶玉)씨는 이런 표현을 했다. 『이모부는 사각의 유리 방 속에서 바깥의 자유를 구경만 하다가 끝내 그 벽을 부수지 못하고 사라져 간 사람이다』나의 감상을 덧붙인다면 이수근(李穗根)씨는 이데올로기의 장벽 너머에 있는 자유를 향해 비상하려다가 추락사한 한 마리 작은 새였다. 바다새가 된 이명준(李明俊)의 영혼처럼 무덤 없는 사자(死者) 李穗根씨의 고혼(孤魂)도 아직은 정처 없는 방황을 계속하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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