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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그리려다 지렁이를 그리다 /최성재

세태풍자 2006. 10. 4.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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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그리려다 지렁이를 그리다
 
  나는 그림을 못 그린다. 유치원생보다 못 그린다. 대학 다닐 때 세 살 난 조카가 코끼리를 그려달라고 했다. 못 그린다고 몇 번이나 사양했다. 귀여운 조카가 나중엔 떼를 쓰다가 울었다. 자신이 없었지만, 마음이 약해져서,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서 나는 정성껏 진땀을 흘리며 간신히 코끼리를 그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나 보기에 제법 그럴 듯했다. 그런데, 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조카가 한 마디로 감상문을 요약했다.
 --삼촌, 이건 돼지잖아!
 갑자기 내 눈이 밝아지면서 나의 걸작이 훤히 보였다. 맞았다. 그것은 돼지였다. 돼지도 괴상망측한 돼지였다. 그 후로 다시는 어린 조카가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나보다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은 없으리라, 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가는 스탈린이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징기스칸 이래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고 주변의 숱한 나라들도 그 휘하에 거느리고 노동자 농민의 천국을 건설한다고 우렁차게 망치를 두드리고 군가에 맞춰 씩씩하게 행군하더니, 그 망치는 결국 인민의 가슴을 치고 그 군화는 인민의 배를 걷어찼다. 모택동, 김일성, 김정일, 히틀러, 무솔리니, 차우세스쿠, 카스트로, 팔레비, 호메이니, 밀로셰비치, 사담, 뒤발리에, 페론, 마르코스, 아옌데, 폴포트--이들은 일찍이 하늘의 용을 그리려다 땅속의 지렁이를 그린 자들이다. 살아있는 지렁이는 땅을 기름지게나 하지, 이들이 그린 지렁이는 국민을 굶주리게, 목마르게, 아프게, 괴롭게, 허기지게 만들었다. 전국민이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증오의 나라를 만들었다. 공포의 나라를 만들었다. 위선의 나라를 만들었다.
 
  우리 같은 서민이야 그림을 아무리 못 그려도 좀 부끄러워하면 그뿐, 남에게 폐해를 끼치는 게 없지만, 일국의 지도자가 용을 그리겠다고 큰소리치고 기껏 지렁이를 그리면,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람만이 아니라 산천초목도 헐벗게 한다.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이제 선거도 있고 신문도 있고 방송도 있고 인터넷도 있느니만큼, 권력에 환장한 환장이는 정체를 폭로하여 그 베레모를 벗겨야 한다. 라파엘로처럼 밑에 수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그림을 그린 걸 본받아, 권력의 환장이들이 수족처럼 부리는 자들과 그림이 점점 요상해지는데도 최상급의 형용사를 아낌없이 바치는 자칭 미술 평론가의 허위도 낱낱이 밝혀 고개를 못 들게 해야 한다.
 
  최소한 박정희 화가는 주제 파악을 했다. 자기는 용을 알지도 못하고 상상도 못하고 그리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저 밥이 그득한 밥그릇을 그리겠다고 했다.
 --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
 자기가 그리겠다고도 않고 같이 그려보자고 하고는, 밥만이 아니라 국도 그리고 김치도 그리고 생선 반찬도 그리고 빵도 그리고 옷도 그리고, 아담한 슬레이트집도 그리고 학교도 그렸다. 공장도 그렸다. 그리고는 갔다. 한줌 흙으로 돌아갔다.
 
  이른바 양김씨는 어땠는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민주가 햇빛처럼 내리 쪼이고 자유가 공기처럼 넘치는 나라, 믿음이 바닷물처럼 넘실대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거대한 용을 그리겠다고 큰소리 뻥뻥 쳐서 푸른집에 들어선 후에, 매일매일 원수를 찾아내고 적을 만들고 더 큰 용을 더 화려한 용을 그리겠다고, 이게 바로 그 그림을 그리는 기가 막힌 방법이라고, 이 붓을 보라고 이 캔버스를 보라고 이 멋있는 베레모를 보라고, 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보라고, 나쁜 놈이 발목을 잡아서 그렇지, 손목을 잡고 비틀어서 그렇지, 이제 곧 웅장한 용을 그리고 그 눈도 마저 그리겠다고, 선진 한국, 통일 한국의 용을 그리겠다고, 보라고 잘 되어 가고 있지 않느냐고, 선진국의 사교 모임에 가입하지 않았느냐고, 북에서 장군님을 만나지 않았느냐고, 이제 곧 장군님이 남으로 올 것이라고 그러면, 순풍에 돛단 듯이 한 나라 한 겨레가 될 것이라고, 목이 쉬도록 외치고 있다. 엉뚱한 소리하는 자들의 입은 구린데를 감추려고 역습을 하는 것이라고, 색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바른 말 고운 말을 하고 있다.
 
  그 사이 서른 두 어른이 '신사(辛巳)' 선언서를 낭독하고 백 열다섯 원로가 '낡은 장부'를 뒤적이지 말라고 일갈했다. 그 전에 오천 율사가 '실질적 법치주의'를 귀에는 모기같이 낮은 목소리였지만 가슴에는 우레같이 높은 목소리로 호소했다. 단, 그 중에 삼백여명은 얼른 손을 씻었다.
 
  한 분은 누가 보아도 지렁이를 그린 것이 확실하고 또 한 분은 그 추종자들에게만 보이는 거의 완성된 용의 그림에 눈을 마저 그리려고 밤잠을 못 주무신다.
 
  이 세상에 용은 없다. 없는 그림을 어떻게 그리겠는가. 아무렇게나 그려놓고 그게 용이라고 우기면, 어린 백성은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차라리 그리려면 귀여운 돼지를 그리시라. 듬직한 소를 그리시라. 사랑스러운 개를 그리시라. 잘 생긴 호랑이를 그리시라.
  (2001. 8. 21.)
 
  노씨도 양김씨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용은커녕 지렁이를, 실처럼 가느다란 실지렁이를, 새끼 붕어나 좋아할 실지렁이를 그린다. 지록위마(指鹿爲馬)라더니, 실지렁이를 가리키며 용이라고 박박 우긴다. 그 사이 미사일이 하늘을 날고 원자탄이 땅속에서 우르릉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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