聞慶(문경) 紀行
며칠 전 경북 문경시를 다녀왔다. 서울 도심에서 출발하면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 잔 하고도
2시간30분만에 문경에 도착할 수 있다. 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로 내려가니 가을이 깔리기 시작한 山河가 상쾌했다.
문경에 일찍 도착하여 음식점에서 일행 세 사람이 식사를 했다. 조기조림 세 마리, 고등어조림 한 마리, 파전
하나를 시켜서 된장 한 그릇을 중심으로 맛있게 먹고나니 3인분 값이 1만5000원이었다.
주인한테 "문경은
한자로 어떻게 씁니까"하고 물었다. 40대의 통통한 얼굴을 한 주인은 자신있게 답변했다.
"문 門에 서울
京이지요"
"왜 그렇게 쓰게 되었습니까"
"옛날에 서울로 갈 때 여기가 관문 아니었습니까. 북쪽 새재(鳥嶺)를
넘어야 서울로 갈 수 있었거든요"
물론 문경의 한자표기는 聞慶이다. "좋은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다. 즉 문경에 살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는 희망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문경이라고 한글로만 표기해놓으니 아름다운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
聞慶시청 사람들은 李明博 전 서울시장의 브랜드가 된 남북 大運河 계획에 대해서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충북 수안보의 남한강과 문경의 낙동강(枝流) 상류를 지하 터널로 연결한다는 것이 이 계획의 핵심이다. 그렇게 되면 문경은 내륙항구가
되어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긴다는 기대감이었다.
문경은 1000미터급 산으로 둘러싸여 답답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2년 여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朴正熙는 그런 답답함을 트럼펫으로 달랬다. 아침 일찍 하숙집에서 일어난 朴교사는 定時에 트럼펫을 불었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 문경읍 사람들은 "朴 선생 나팔소리다. 이제 일어나야지"라고 말하곤 했다.
그 박정희
교사가 하숙했던 집은 '청운각'이란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방명록은 있으나 관리인이 보이지 않았다. 설명을 해줄 사람도 없었다. 7년 전에
들렀을 때도 그러했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대구사범 재학중 결혼했던 박정희는 신혼살림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 하숙집에도 혼자 있었다.
제자들은 총각선생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에겐 자상한 선생이었지만 일본인 교장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그는 만주로 떠나 군인이 되었다. 그가 문경에서
부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면, 日帝下 교사직에 만족했더라면 그는 군인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고,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한국의
현대사도 다소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죽은 지 27년이 지났으나 대한민국은 아직도 그를 기념하기 위한 건물
한 채도 지어주지 않고 있다. 건국 대통령 李承晩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던 金九 기념관은 굉장하다. 여론조사에선 박정희가
세종대왕보다도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국민들의 지지가 현실의 세계에서 무력화된 이유는 물론 대한민국의 건국과 근대화를 부정하는 좌파의 득세
때문이다.
문경에서 돌아오는 車中에선 이미자 노래 테이프만 들었다. 바깥이 캄캄해서 경치 구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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