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史.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
김 관 태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부총장)
目 次
1. 들어가는 말
2. 고구려사의 역사적 의미
1)역사성
2)영토성
3)남북통일로 가는
길목에 고구려사가 있다.
3. 한국사의 현실
1)한국인의 역사인식
2)외국인이 보는 한국인의
역사인식
3)현실 극복을 위한 대안
4. 나가는 말 (해결방안)
1. 들어가는 말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이다” 이라고 말한다. 반만년의 역사란 어디에다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바로 4337년 전에 건국된 단군조선을 기점으로 해서 반만년의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의 모습은 단군을 신화적 인물이라 매도하고 단군상을 우상이라 파손시키고 있다. 역사적 사실과 신화적 요소를 일방적으로 허구라고 부정한다면 우리의 역사는 오로지 수난의 역사가 주종을 이루게 된다. 몽고족의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 40년, 6?25 동족상전 등 고려와 조선왕조 때에는 중국을 상전으로 받들어야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한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황국식민사관으로 철저한 우민화 교육을 실행한 결과 우리는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으로 사분오열되었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치 하에서 서구문물의 우월성을 교육받았으며, 6?25동란으로 2천만 이산가족의 슬픔을 않고 살아온 근세 천년은 이런 수난만을 겪으며 당하고만 살아온 민족으로 도저히 민족에 대한 긍지와 자존심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신화라고 빼 버리면 우리는 고구려, 백제, 신라 이래의 2천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 말해야 하고,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는 볼품없는 민족이 되고 만다. 이러한 민족적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을 극복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회복하는 길은 바로 우리 민족의 바른 역사를 오늘에 되찾아 민족에 대한 긍지와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근래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은 한민족의 역사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 점을 고마워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주도한 소위 “동북공정”은 한민족사의 근본뿌리를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그 동안 잠자던 한민족의 혼을 일시에
깨워놓기에 충분했다. 근래 국내외 한민족이 고구려사를 지키자는 열기를 볼 때 다소 때늦은 감은 있으나 불행 중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연중행사처럼 역사왜곡의 사건에 시달려 오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 역사왜곡에 감정이 무디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이 식지 않았음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한?중?일 간에는
각자의 잣대로 역사를 보았고, 자기의 기준으로 역사를 재단해 오면서 급기야는 작금의 “역사전쟁”으로까지 비화되기에 이르렀다.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우리 자신과 상대편도 다시 한 번 점검해보고, 우리의 나갈 바를 찾아야 한다.
중국의 고구려사 찬탈의 중심에는 대략
1,375만 위엔((Yuan, 元),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20억 6,250만원 의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는 중국정부가 있고, 그들이 내세우고자
하는 논리개발의 중심에는 ‘동북공정’이 있다. 그동안 전 국민이 매스컴을 통해서 너무도 많이 들어 왔지만,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이에 부응하고자 이번 강의에서는 동북공정의 배경과 목적, 추진조직,
실행하고자 하는 프로젝트 내용을 살펴보고, 고구려사 찬탈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는 고구려사를 왜 지켜야 되는지 그리고 우리는 현실적으로
대응방안은 무엇이며,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확실히 하고자 한다. 오늘 새롭게 우리역사를 바르게 세워야 할 이유는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2. 고구려사의 역사적 의미
1) 역사성
우리가 오늘 세계속의 한국으로 사용하는 국명 “코리아(Korea, Corea)는
‘고구려’에서 기원했음을 다 알고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 ‘고구려’를 중국역사의 일부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과거 한, 위진, 남북조, 수, 당,
송, 원, 명, 청, 중화민국 어느 시기에도 하지 않았던 21세기 역사 사기극을 연출하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중국사를 기술하는 옛 사가들은
자국을 높이고 이웃국가를 비하해서 기록하는 소위 ‘춘추필법’ 악습이 있어 왔으나, 그래도 이웃국가의 역사는 분별 할 줄은 알았다.
예컨대
동북쪽의 이웃민족과 국가의 역사는 ‘동이전(東夷傳)’ ‘북사(北史)’등으로 분류하여 중국역사가 아닌 외국역사, 외국과의 관계사임을 명백히 하여
‘고구려사’는 ‘동이전’ 에 포함시켜 놓았었다. 그리고 중국정사(中國正史)에서는 ‘고구려’를 ‘고려’라고 호칭한 사서가 더 많이 있다.
‘남제서(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은 ‘고구려’를 공식적으로 ‘고려’로 기술하고
있다. ‘구당서’는 “고려(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라고 했고, 당나라의 창업주인 고조(高祖)가 622년 고구려 영류왕에게 보낸
공문편지에 “이제 두 나라가 화평을 통하게 되었으니(今二國通和)”라고 쓰고,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 잡힌 군인 포로들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고려(고구려)는 수나라 군인포로 1만 명을 당에 반환해 주었다고 ‘구당서(舊唐書)에 기록하고 있다. 이때만 해도 당
고조(高祖)는 고구려를 당의 일개 지방정권이라고는 꿈에도 망상하지 않았다.
라·당이 연합하여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수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고구려 유민들은 피란민이 되어 대거 남하해서
‘송악(松岳:개성)’이 고구려 유민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라가 쇠약해지자 601년 ‘궁예’가 고구려 유민을 기반으로 ‘후고구려’인 ‘고려’를
‘송악’에 세웠다. 그러나 포악한 ‘궁예’가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고 국명도 ‘마진(摩震), 태봉(泰封)’으로 고치자 ‘송악’의 고구려유민
후손 세력은 ‘궁예’를 버리고 ‘왕건’을 추대하게 된다.
‘왕건’은 918년 국호를 ‘고려’로 회복하여 고려왕조를 개창하고 ‘송악’을
수도로 정하고 페허가 된 평양에 황해도 고려유민을 이주시켜 ‘평양’을 ‘서경’이라 이름하고 양경(兩京)체제를 만들었다. 고려태조 ‘왕건’은
자손에게 남긴 ‘훈요 10조’의 제5조에서 “서경은 아국(고려)의 지맥의 근본이다.”라고 하여 “고려의 근본은 고구려(평양)의 계승”임을
자손에게 명백히 하였다. 고려(고구려)는 중국 및 동남아 국가들뿐만 아니라 아랍 국가들과도 무역과 교류를 했으므로 세계에 한국이
‘고구려-고려-코리아’로 알려지게 되어 그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외국인의 출입을 통제한 채 비밀리에 ‘집안’의 고구려 유적 발굴과 도시정비 공사를 시행했고, 국내성 천도 2천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작년 10월에 했으며, 고구려 문화유산을 유네스코에 등록했고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을 모든 관광안내문에 기록하고
방문객들에게 교육하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는 기원전 37년, 졸본에서 건국한 고구려가 국내성이라는 새로운 수도로 천도한지 2001년이 되는
해다.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동아시아의 맹주 역할을 했던 고구려, 700여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동북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했던
대제국 고구려는 현실적으로는 중국 영토 내에서 이렇게 이미 왜곡되고 고구려가 지배했던 광활한 만주땅 역시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400년이 지난 지금, 그 후예들인 우리가 잘못해서 고구려사와 광활한 영토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말 것인가?. 우리가 고구려의 역사를 지키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지키는 것이요, 고구려사의 역사성은 한민족의 운명과 함께 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고구려사의 역사성은
우리에게 실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2) 영토성
‘동북공정’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학자들의 논리는 대체로 크게 3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 고구려는 중원민족의 한 갈래가 세웠으며, 둘째, 중국 땅에서 건립되었고, 셋째, 중국에 공물을 바치는 등 그들의 통치 질서에 있었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국내민족간의 전쟁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평양’ 이북은 중국의 영토라는 개념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발상의 뿌리에는 간도 영유권 분쟁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속셈이 깔려 있다고 본다.
간도(間島) 영유권 분쟁의
역사는 지금부터 30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와 발해를 거치며 우리민족의 영토였던 간도에는 발해가 망한 뒤 여진족이 살면서 조선
초기까지 조공을 바쳐 왔다. 그러다가 그들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 본토로 들어가면서 간도를 비우게 되자, 조선의 이주민들이 들어가 미개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처음에는 자국민의 거주를 금하였으나, 산둥지방으로부터 이주민이 몰래 들어가 조선 이주민과 충돌이 빈번해 지자
국경확정의 필요성을 느껴 1712년 목극등(穆克登)을 보내 변계를 심사하게 했다.
이때 세운 것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다. 정계비의
중심내용은 “서위앞록(西爲鴨錄)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는 8글자다. 양국의 국경을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으로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1880년대로 가면서 다시 ‘토문’이라는 두 글자가 문제가 된다.
정계비에서 말하는 ‘토문강’을 어느 곳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양국의
이해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조선은 송화강 상류에 있는 지류가 ‘토문강’이라 하였고, 청나라는 발음이 비슷한 ‘두만강’이 ‘토문강’이라고
주장 했다. 두만강의 중국식 표기는 도문(圖們)강이다.
간도 영유권분쟁은 러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상황이 급변 명목상의 주권은 가지고 있지만 외교권은 박탈당했기에 간도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간다. 일본은
만주진출을 위해 1909년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중국의 논리대로 간도를 통째로 중국에 넘겨준다. 일본은 그 대가로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푸순탄광 개발 등의 4대 이권을 챙겼다.
그런데 ‘청·일 간도협약’의 바탕이 됐던 ‘토문강=두만강’설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중요한
지도가 최근에 발견 되어 중국의 주장을 뒤집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 지도는 1909년 일제가 제작한 지도인데 ‘토문강’을 ‘두만강’ 아닌
‘송화강’ 지류로 표기를 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1909년 청·일협약에 따른 간도의 중국 이양은 근거가 잘못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토문강(土門江)’을 ‘두만강(豆滿江)’이 아닌 별개의 ‘송화강’ 지류로 분명히 밝힌 이 지도는 1909년 ‘청·일 간도협약’ 당시 일본 측이
만든 것으로 ‘조선과 청의 국경인 토문강은 두만강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줄곧 주장해온 중국에 대한 중요한 반박자료일 뿐 아니라 간도가 조선
땅이었음을 밝히는 결정적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지도는 이상태(李相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이 최근 서지학자 고
이종학(李鍾學)씨의 소장자료 중에서 찾아내 2004년 6월8일 공개한 이 지도는 ‘제9도(第九圖) 백두산 정계비 부근 수계(水系) 답사도’라는
제목 아래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두만강·송화강(토문강)과 그 지류의 흐름을 상세히 그려 놓은 것이다.
지도에는 ‘메이지(明治)
42년(1909년) 10월, 축척 40만분의 1’이라고 제작연도와 방식을 밝히고 있다. ‘조선총독부 도서’ 직인과 ‘아홉 번째 지도’라는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일제 통감부나 군부대가 전략적인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별첨 지도그림 참조>
지도는 백두산
부근에서 동북 방향으로 흐르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여 송화강과 합류하는 하천에 ‘토문강’이라는 이름을 명기해 놓았고, 동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두만강’이라 적어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의 다른 이름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1712년(숙종 38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는
‘압록강과 토문강을 조선과 청의 경계로 삼는다’고 적었으나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로 해석한 한국과 달리 중국은 ‘토문강=두만강’설을 내세워
간도지역이 청나라 영토였다고 주장해 왔던 간도의 영토문제는 이제 우리가 되찾아야 할 땅임을 분명해 졌다.
우리에게 간도는 어떻게 느껴지고
있는 곳인가? 간도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원했던 민족시인 윤동주의 고향이기도 하고, 단군조선으로부터 민족의 시원의 역사가
깃든 곳, 용맹이 하늘을 찌르는 기마민족, 고구려의 찬란한 기상이 흘러 넘쳤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제 36년을 거친 사이 간도는
우리에겐 까마득한 옛날 얘기로 잊혀져 갔다. 지금은 중국의 소속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간도는 실은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땅이다. 중국은 이를 알고 사전에 계략을 세우고 의도적으로 정부가 나서서 역사왜곡을 선동했던 것이다.
3) 남북통일로 가는 길목에 고구려사가 있다.
남북한이 동질성을 가지고 공조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는 바로 통일로 가는 길목이 되고도
남는다. 우리는 혈연공동체이며, 언어공동체요, 문화공동체 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는 한민족의 역사에 한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화랑도 정신, 백제의 무사도정신, 고구려의 다물정신은 단군조선의 맥을 이은 한민족 정체성이다. 오늘 한민족의 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문화유산은
우리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정체성으로 남아 있다. 특히 고구려의 건국 목적은 단군조선의 ‘다물’이었다. 잃어버린 단군조선의 건국정신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정신을 다물할 뿐만 아니라 단군조선의 고토를 다물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뿌리를 남과 북은 공유하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북한에서는 이미 김일성 주석 생전에 ‘김일성 주체사상’으로는 불원한 장래에 정치체제를 유지 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소련의
몰락을 지켜보았고, 동구권의 변화를 보았다.
더욱이 가장 가까운 중국의 등소평 정부의 개혁개방정책,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방식인 시장경제 제도’를 채택하면서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북한의 생존전략을 수정할 때가 된 것이다.
2차대전에서부터 역사의 주 무대에서 잔뼈가 굵어온 유일한 생존자 김일성은 그 대안을 ‘단군정신’에서 찾았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민족사의
주체 정신을 ‘단군’에서 찾아야 앞으로 민족적 통일 과업을 이룰 수 있음을 간파한 그는 지체 없이 ‘단군릉’을 축조하고 역사학자들을 동원하여
학술적인 뒷받침을 하였다.
이러한 역사의식이 나오는 데는 다행히도 해방 후 대부분의 식민사학자는 모두다 남한에 정착하였고, 북한에는
월북한 민족사학자의 노력으로 식민사학과 실증사학에 물들지 않았다. 대륙사관에 입각한 바른 민족역사인식이 기본적으로는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물론 그 위에 유물사관과 주체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그러나 주변 정세의 변화는 유물사관과 주체사관에 상관없이 새로운 민족사관으로 전환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황장엽등 일부 학자들에 의해 급조된 주체사상은 허울로 씌워진 것일 뿐, 민중 속에 의식화 된 민족의식은 ‘단군능’과 함께 다시
일어났고, 남북간에 통일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자리 매김 하기에 충분했다. 단군조선으로부터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유구한 민족사를 공유한 단일민족이
반세기의 짧은 분단은 어찌 보면 새로운 한민족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길목에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있다. 남북간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과 대륙 만주와 간도를 되찾아야할 공동의 사명을 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숙원을 푸는 제1차적 단추는 한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한 유일 합법정부의 탄생이다. 일당독재와 이데올로기의 타당성이 퇴색된 지 오랜 지금
아직도 북측은 정권유지를 위하여 무고한 백성을 볼모로 잡고 핵을 앞세워 체제유지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흐르는 역사의 대세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훌훌 털어버리고 역사의 강물에 올라타고 함께 흘러가는 것이 모두를 위하는 일이다.
남측도, 북측도 민족사에 다시
찾아온 100년 전의 국제적 각축전이 재현되고 있음을 직시하자. 역사적인 실수는 지난 세기에 한번으로 족하다.
3. 한국사의 현실
1) 한국인의 역사인식 문제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그동안 우리는 외국인도 추앙하는 우리의
역사와 정신을 우리는 왜 외면하고 있단 말인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국내가 시끄러워지자 뒤늦게 정부는 대응책을 마련한다고 부산을
떨었으나 고작 ‘고구려연구재단’하나 만드는데 그쳤다. 중국은 20년 전부터 소수민족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1996년부터 ‘동북공정’에 고구려사와
동북변방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70여명이 배치되어 어떻게 논리를 세울까 밤낮으로 연구하였는데 비해, 한국은 막상 이 문제가 터지자 정부
내 연구기관에 고구려사와 관련된 연구원 5명밖에 없는 현실에다 이마져 식민사학과 실증사학의 논리에 젖어 대륙사관을 허구로 보는 연구자들이다 보니
다음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2004년 10월 19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소속 한나라당 정의화, .정문헌 의원의
국정감사 질의 자료에 보면 외교통상부 산하단체인 ‘국제교류재단’이 지난 94년부터 96년까지 중국학술단체의 고구려사 왜곡 저서 발간에 무려
4만4천달러(한화 5천 2백여 만원)의 예산을 지원한 사실이 확인됐다. 동 재단이 94년 지원한 예산은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원에서 동북공정의
핵심 저서인 ‘중.조관계통사(中朝關係通史)’의 연구와 출간에 쓰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책에서 “고구려사를 중국의 일부 또는 지방정부로
기술”하고 있고, “요동지역은 원래 중국의 땅”이라고 왜곡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그동안 우리의 역사인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역사의 참모습이 후세에 전달되지 못한데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잦은 침략의 전화(戰禍) 속에서 수많은 사서(史書)가 불타 없어져 버렸고, 또한 그들의 계획적인 역사왜곡 기록으로 인해 역사의 맥이
단절되고 뿌리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왜곡된 이유로 ‘3독(毒)’을 들고 있다.
즉 “사대주의사관에 의한 중독(中毒), 식민주의사관에 의한 왜독(倭毒) 그리고 지금 역사 연구의 주류를 이루는 실증주의사관(랑케사학이라고도
한다)에 의한 양독(洋毒)의 피해에 의해서 우리역사가 왜곡되었다”고 했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우리민족의 역사가 왜곡된 이유는 중국이나
일본에 의해서 말살하고 왜곡한데도 원인이 있지만, 바로 우리나라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왜곡이 되었다”고 했다.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 왜곡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그리고 조선시대 ‘동국통감’을 지은 서거정 같은 우리나라의 역사가들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했다.
조선왕조의 지도이념은 유교 특히 중국 중심의 정치 이데올로기인 주자학의 영향 속에서 5백년을 보냈다. 조선왕실은
중국의 천자를 받들어야 했고, 우리민족은 중국과 중국 사람을 상국과 상전으로 모셔야 했다. 그리고 사대주의적인 중국사관에 의해 우리역사와 정신은
크게 왜곡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역사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도 보통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문제이다.
중국은 철저하게 중국 중심주의를 제창하였다. 자기주위의 민족을 오랑캐라고 지칭하면서 자국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 하였다.
이웃나라의 역사는 공자이후 상대를 철저하게 왜곡하여 비하하는 전통적인 ‘춘추필법’을 적용하였다. 공자 이후 후세의 지나(支那, 중국)의 사가들은
3가지 버릇이 생겼다. 첫째, 자기나라의 허물된 것은 말하지 않는다(爲邦避隔). 둘째, 저는 높이고 남은 낮춘다(我尊他卑). 셋째, 자기 것은
상세히 말하고 남의일은 줄여서 말하는데(詳內略外).
이러한 춘추필법에 의해 쓰인 중국 중심의 역사책들에 의존하여 ‘삼국사기’를 비롯한 소위
우리의 정통 사서들이 만들어졌다. 중국은 우리민족의 찬란했던 역사와 자기들의 진실된 역사를 감추기 위해 진시황은 BC 221년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제일먼저 우리 동이족의 영광스런 역사가 담겨있는 모든 서적을 불태우게 했다. 그 후에도 중국의 압력에 의해 세조 3년 1459년
조선조정에서는 ‘고조선비사’,‘ 천부경’, ‘대변설’,‘ 도징기’, ‘삼성밀기’, ‘옥추경’, ‘조대기’, ‘지공기’, ‘통천록’, ‘표훈천사’
등 19종의 동이족의 역사와 사상을 기록하고 있는 책들을 금서(禁書)로 지정하여 거두어 들였다. 그런데 이 책들은 우리민족의 근원을 밝히는
책이다. 그 당시 명나라의 첩자가 조선에 상주하고 있었으며, 금서를 읽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보이지 않는 룰이 있었다.
그 조선시대가
끝나자 이번에는 그동안 우리에게 문화를 배워갔던 일본인들에게서 피맺힌 36년간을 겪어야 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에, 우리나라를
영원히 통치하기 위해서 1910년 11월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51종 20여만 권의
사서들을 약탈해 갔다.(총독부관보에 근거하면 약탈해간 상당 부분의 책은 아직도 일본 황실도서관 ‘정창원’에 보관 중이다). 그리고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하는 필요한 서적만을 남기고는 모두 불태웠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에서 수집해 불태운 책이 3일간이나 경복궁에 종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인쇄술로 그 정도의 양이면 거의 모든 책들이 불탔다고 보여 진다.
일제는 약탈하는데 그치지 않고,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한다. 1922년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서‘조선사’를 편찬한다. 당시 한국인으로 참여한 대표적 인물이 이병도(이완용의
질손)로 今西龍(이마니시)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일등공로자가 된다.
일본이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는데 목표를
둔 3대 기본요강이란 것이 있다. 1919년 3월 기미독립운동을 일으킨 뒤에 제3대 제등실(齊藤實,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하면서 교활하게도 조선인을 반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교육시책을 썼다. 일본인이 조선사를 편수하는 그 근본정신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사이토 총독 취임사 전문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半日本人)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제일 먼저 우리나라의
국조와 상고사를 부정하여 신화로 전락시켜 곰의 자손으로 만들었으며, 두 번째로 반도사관을 주입시켜 대륙역사의 주인이었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축소했고, 셋째로 한국민족은 오늘까지 제대로 완전한 독립을 해 본적이 없는 유랑민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분열을 일삼는 망국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만들어 당연히 일본이 보호를 해야 함을 합리화하고자 한 것이 식민사관의 목적이었다.
일제시대 때 역사를 그렇게 만드는데
일조하였고, 그들이 가르치는 역사를 배웠던 사람들이 오늘의 역사학자들이고, 그들이 쓴 책으로 지금도 세계인에게 한국의 역사를 교육하고 있으니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최태영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학자들은 이러한 역사 왜곡의 내용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다 안다.
우리가 조선의 역사를 왜곡 조작하였다는 것을, 일본이 이렇게 빨리 문명화된 것은 다 역사를 조작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알렸다가는 자부심이
없어지고 기가 죽어 안 되니까 거꾸로 해서 용기를 내게 했다. 기를 살려서 청일, 러일전쟁을 이겼다”고 고백한 것을 KBS 대담프로에서 증언한바
있다.
일본사람들은 다 알고도 속이는데 우리는 몰라서 속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면서 까지 역사를 가르치는데 우리는
사실역사마저 왜 부정하게 되었는가? 이제는 그들의 농간에 놀아난 100년 세월 이제는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2) 외국인이 보는 한국의 역사인식 문제
고구려사는 한국사인가? 중국사인가?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물음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상반되는 두 가지의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의 견해는 한국사는 중국과
일본의 속국으로 볼품없는 민족사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문명의 개척자요 그 정신은 미래 인류의 희망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은
여전히 고구려사를 한족(漢族)의 변방사로 왜곡, 내심 고구려사를 한국의 고대사로부터 분리시키겠다는 속내를 드러내면서도 다만 한국측의 강경한
항의에 못 이겨 이를 호도하려는 듯한 미봉책으로 대응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및 유럽 등 세계 주요 나라들은 고구려사가
한국의 고대역사의 일부분임을 세계사에서 분명히 명기하고는 있지만, 보다 더 큰 문제는 고구려사가 아니다. 한국사 전체를 보는 시각에 심각한
문제가 제기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 세계 역사학계는 주로 일본과 중국에서 발간 된 역사자료를 대부분 인용해 왔기 때문에 역사 왜곡의
심각성은 말로 형용키 어려운 지경이다.
우리가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우방인 미국의 한국사 인식은
어떠한가?
‘한반도역사바로알리기’에 앞장서온 사이버 민간외교 사절단 ‘반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한국역사 왜곡의 미국 내 최대
진원지로 중앙정보국(CIA)과 콜럼비아대 온라인 백과사전이 꼽힌다”고 한다. 미국의 주요 포털, 학습, 관광 사이트는 위의 두기관의 자료를
근거로 한국사 콘텐트를 제공하고 있는데 모두가 중국과 일본이 제공한 자료를 참고하고 있다.
한국사 왜곡의 주요 내용은 “고조선은 기원전
12세기 중국의 학자 ‘기자’가 한반도 북부에 만든 나라다. 당시 한반도 남부는 일본 야마토 정권의 지배력이 미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중국의 일부임을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나아가서 “강대국 사이에서 문을 닫고 있던 은둔의 나라”, “동해는 일본해다”, “한국은 중국의
식민지였다”, “독도는 다케시마다”, “청일 전쟁이후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 중고교 역사교과서의 한국사부분을 보자면 위의 논지를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한심하다 못해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진실이 왜곡된
역사교육을 받은 미국인의 한국사에 대한 이해는 어떠할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별첨자료참고)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한국사를 인류시원의
역사로, 건국정신을 미래 인류의 희망으로 말하기도 하는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양심적인 석학들도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25시의 작가요 신부인 게오르규는 우리민족의 정신을 “세계가 잃어버린 영혼”이라 하였으며 “이 정신이 다시 21세기에 일어나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한다”고 프랑스 주간지에 크게 기고했다.
1974년 3월 한국 방문시 “한민족이 낳은 弘益人間 사상은 미래 21세기의
태평양시대를 주도할 세계의 지도사상이다.”라고 하면서 3월 3일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25시’에서 ‘빛은 동방으로부터 온다’라고
했는데, 그 빛은 한국에서 찾아야 하겠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 했을 때 그가 인류의 빛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1986년 4월 8일 ‘라프레스 프랑세스’ 라는 주간신문에 기고하기를 “홍익인간이란 단군의 통치 이념은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법률 중에서 가장
강력한 법률이다.”라고 했다. 88올림픽 기간 중 한국을 방하여서는 “21세기 한국의 ‘효(孝)’정신을 중심으로 한 전통문화가 체계화 되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한다.”고 진단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당신은 세계가 잃어버린 인류의 영혼입니다.
왕자의 영혼을 지니고 사는 여러분,
당신들이 창조한 것은 냉장고와 TV와 자동차가
아니라,
지상의 것을 극복하고 거기에 밝은 빛을 던지는
영원한 미소입니다.
내일의 빛이 당신네 나라인 한국에서 비쳐온다 해도
조금도 놀라지 마십시요.
왜냐하면 당신들은 고난의 수렁 속에서
스스로의 슬기와 용기와 힘으로
고개를 쳐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나라는 나라가 어려울 때, 성인(聖人)이 나오는데 한국은 성인(檀君)이 나라를 건국했다”. 정작 알아야 할 한국인들 중에 단군시대와 단군을 인정하지 않으며 시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외국의 대통령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우리는 과연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3) 현실 극복을 위한 대안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스스로를 정확히 알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3중고의 전쟁 중이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고, 중국과 일본이 역사를 찬탈하고 있으며, 세계화, 정보화라는 미명하에 침투하는 서구문화는 우리의
전통가치를 송두리째 무너트리고 생존경쟁의 전쟁터로 우리를 내몰고 있다.
첫 번째 전쟁은 남과 북의 대치상황이다. 전쟁은 꼭 겉으로 보이는
군사력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중국역사에서 전진과 동진이 겨뤘던 비수대전을 예로 들 수 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던 나라인 전진은 기병 20만 명에 병사 60여만 명의 대군이 있었다. 중원을 장악한, 경제력도 동진과는 비교
할 수 없었다. 동진은 8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진이 패배했다. 결정적인 패인은 전진군의 내부에 적과 내통한 배반자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 싸우려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첨단무기로 중무장을 해도 싸울 의사와 전의가 없는데 무슨
싸움이 되겠는가. 게다가 우리내부에는 북한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이적행위 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어떻게 승리를 장담 할 수
있겠는가?
김정일 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이후 대한민국 내 활약 중인 공작원들에게 내린 7대 지령이 거의 모두 실현 되어가고
있다.
첫째, 국회를 점령하라.
둘째, 국가보안법을 철페하라.
셋째, 전교조에 의한 유치원, 초등학생에서부터 공산주의, 사회주의 의식화
교육을 실시하라.
넷째,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라.
다섯째, 교회를 파괴하라.
여섯째, 미군을 철수시켜라.
일곱째,
민주노총, 한국노총에 의한 조직적인 파업시위로 기업체들을 파괴하라.
김대중 정부의 6.15 공동선언으로 우리는 금방 남북통일이 될 것 같은 착각 속에 한때는 ‘정일 오빠부대’까지 등장 했다. 그동안 박정희 정부로부터 반공을 정권유지차원에 너무 남용한 나머지 국민들에게는 오히려 그 반대의 심리적 해이감이 만연하게 되었고, 북한은 이를 대남공작에 최대한 활용 하였다.
둘째는 경제전쟁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란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사람밖에 없다. 그런데 근면하던 우리가 언제부턴가 놀고먹으려
하면서 3D업종에는 외국인 근로자가 없으면 안 되게 되었다. 사회는 개인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로 편할 날이 없다.
경제적으로 기업들은
국내에서 사업할 의욕을 잃고 외국으로 이주하고, 국내에는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다. 내년에는 10명에 1명밖에 취업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생활고에 자살이 잇따르고, 신용불량자는 넘쳐 나고 있다. 거기에 전대미문의 달러약세로 환율파고까지 겹쳐 2만 달러는 고사하고 경제가 폭삭 내려
안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만약 이대로 상황이 계속 진행 된다면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미래는 낙관 할 수 없다. 정치는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고, 정부를 책임진 공무원은 제 잇속만 차리며, 잿밥에만 관심이 많아 부정부패가 그칠 줄 모른다. 어떻게 일구어 온 대한민국인데 이대로
좌초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안하면 누가 하겠는가? 바로 너와 내가 주인이 아닌가?
셋째는 역사와의 전쟁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역사와 문화전쟁을 격렬하게 치루고 있다. 전 세계가 자국 이기주의에 빠져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여 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것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 찬탈행위다. 그리고 무분별한 서구문화의
추종이다.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으로 겪는 교육파탄, 가정파탄, 사회적인 갈등 양산 등은 우리사회를 총체적 망국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
사회기강이 무너진 지 오래다. 어디한곳 성한 데가 없다.
우리조상이 물려준 미풍양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외래문화가 판을 점령하여 2중적
가치혼란 속에 사회적 갈등이 양극화로 치달아 마침내 망국으로 가기 일보 전이다. 이 모두의 원인은 한 곳에서 연유한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
가치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시 찾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앞의 ‘한국인의 역사인식’에서 보았듯이 조상의 역사를
팔아먹은 지 오래다. 그런데 이제 바른 역사를 찾을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중국의 고구려사 찬탈 시도에 잠자던 민족혼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전쟁은 이렇게 외부에서 내부로 한꺼번에 정리하는 운기가 되었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 할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한국 고대사 찬탈이 일본의 역사왜곡사건보다 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705년 지속되는 동안 중국대륙
안에서는 35개의 나라가 세워지고, 멸망했는데 누가 누구의 지방정권이란 말인가? 과거 중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지도 않을 때에 발해에는 고구려
유민이 300만 명이나 들어가 살았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북방역사를 추적하면 할수록 오히려 중국의 역사는 없다. 만약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킨다면 우리역사는 2,000년으로 줄어들고 공간적으로는 한강 이남으로 밀려 나게 된다. 거기에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로 또 한번 우리역사를 찬탈 한다면 과연 우리 역사는 얼마나 남을 것인가? 그동안 우리가 어찌 살아 왔길래 지금 이 시대에 조상의
역사마저 찬탈을 당하게 되었단 말인가?
4. 나가는 말(대응방안)
‘고구려사’는 ‘우리역사’라고 목청만 높인다고 우리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란 그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
사람들의 몫이다. 현재의 삶은 과거의 결과이며 미래의 시작이다. 철학자 ‘키케로’는 “역사를 알지 못하면 일생 어린이로 남아 있게 된다”고
했다. 참으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바른 역사를 찾는 것은 자신을 찾는 자주독립운동 이라 할 수
있다.
바른 역사를 찾는 민족운동은 그런 맥락에서 민족자주독립운동이다. 해방이 됐는데 무슨 독립운동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으나, 우리는
진정한 민족자주독립과 광복은 못했다. 민족의 바른 역사를 찾아야 하겠고, 민족의 바른 정신을 찾아야겠고, 우리의 훌륭한 조상을 찾아야겠다.
그리하여 한민족이 인류평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바른 민족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한민족의 자주독립과 광복을 이루었다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조화와 상생의 홍익정신으로 체제와 이념의 갈등을 넘어 남과 북이 한데 어우러져서 평화통일을 달성 하고 인류공영에 향도역을 담당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 귀한시간에 참석하신 여러분과 함께 마지막으로 한국정부와 세계한민족 모두에게 몇 가지 제언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 대륙민족사관을 확립하여 한민족의 바른 역사를 광복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운 국사교과서로 개정하여 학교 필수과목으로 교육하고
이를 전 세계에 보급하자.
한국 이외의 세계 어느 나라가 국사교육을 소홀히 하는 나라가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국사교육이 학교교육에서
사라졌다. 국가공무원시험에도 과목이 없다. 이렇게 국사를 푸대접하고도 나라가 잘 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날 나라꼴이 말이 아니지
않은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이는 국사교육을 소홀히 함으로서 민족적 가치관이 사라진 때문이다. 물론 왜곡된 국사를 가르치기
보다는 차라리 그동안 안 가르친 것이 잘한지도 모르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제발 바른 눈으로 바로보자. 제일 먼저 할일은 우리의 바른 역사와 바른
가치관을 찾아 민족의 정체성을 바르게 세우자. 그리고 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자. 국가를 영도할 모든 공직자는 바른 역사를 필수로 알게 철저히
검증받게 하자. 그리고 세계에 왜곡되어 교육하고 있는 한국사를 바로잡아 상대를 바르게 알도록 하자. 서로가 상대의 역사를 존중하도록 하자.
세계화는 바른 역사를 알고 알리는 데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역사교육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이 어떠한 역사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왔는가를 가르치고 그 민족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 교육을 통하여 이스라엘이나 일본 등이 세계 강대국이 되었다.
역사교육은 민족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나아가 우리의 홍익인간 이념은 우리나라만 잘되자는 가르침이 아니다. 전 인류가 조화와
상생의 정신으로 서로 존경하며 하늘의 뜻을 이 땅에 펼치자는 철학이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나타난 그 어느 종교, 철학, 사상도 인류를 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옛날 우리 조상은 홍익인간 이화세계 이념으로 모든 인류를 평화롭게 다스렸다.
이 지구를 구하고 인류를 전쟁에서, 분열에서
구할 수 있는 조화로운 사상이 바로 한민족에게 있음을 우리 민족 개개인이 깊이 깨달아야겠다. 그 길은 역사교육을 민족사관, 홍익사관의 관점에서
가르치고 일깨워야 한다. 그럴 때 우리민족에게 희망이 있고 인류에게 희망의 서광이 비출 것이다.
둘째, 개천절(음 10.03)을 한민족의 날로 선포하고 ‘세계한민족축제’를 정례화하자. 개천절은 한민족의 생일이자 국가의 최고 경축일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10월 1일 민족의식과 민족정기를 고취하기 위하여 '국경일에 관한 법률'(법률 제53호)을
제정·공포했다. 당시 4대 국경일 중 하나인 개천절은 민족국가의 건국을 축하하는 국가적 경축일인 동시에, 문화민족으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경축하며
하늘에 감사하는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명절이라 할 수 있다.
개천절은 한웅이 홍익인간, 이화세계 정신으로 백두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개천한
날이다. 또한 4337년 전, 단군왕검이 홍익인간 정신을 계승하여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 이후부터 매년 10월에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고려의 팔관회 등의 이름으로 왕이 주관하는 제천행사를 열어 개천을
기념하였고. 조선시대 세종 때는 원구단을 세워 민족의 주체의식을 높이고 제천의 정신을 되살리기도 했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에도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했다. 광복 후에는 광복절과 함께 개천절은 민족의 최대 축제일이 되었고,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해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하고 경축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 민족은 10월을 상달(上月)이라 부르며 매우 귀하게 여겼다. 이 달에 한 해 농사를
추수하고 햇곡식으로 제사상을 차려 감사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천행사를 행했다. 3일의 3의 숫자를 길수(吉數)로 여겨왔다는 사실은 개천절의
본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단군을 모시는 종교가 있다 하여 이와 결부지어 대통령이 민족의 생일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종교는 종교이고 민족의 탄생일과 관련지을 필요는 없는 일이다. 예수탄신일이나, 석가탄신일보다 한민족의 생일이 결코 뒤져서는 아니
된다. 변하지 않는 건 우리 모두가 배달겨레요, 단군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셋째, 단기연호를 복원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세우자. 단기연호는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의 공용 연호로 모든 공문서에 사용해 오다
5·16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1961년에 폐지되었다. 정부는 단기연호를 부활시켜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상징성을 되찾아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 민족의정통성을 확립하는 길이다.
이와 함께 대통령의 개천절 행사 참석은 그간 민족정신 관련 단체에서
끊임없이 주장해 온 내용이다. 대통령이 다른 국경일은 공식적으로 참석하는 데 반해 현재 10년 넘게 개천절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국경일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소 놀라워하는 시민들이 많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우선 단기연호 사용에 대해
알아보자. 동양에서 연호의 의미가 남다르고 정부수립 후 줄곧 사용해오던 단기가 군사정권 들어서고 폐지되어 혼용조차 하지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럼, 중국과 일본은 어떠할까?
중국은 고대부터 사용해 왔으며 현재 민국(民國)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일본은 645년에
다이까(大化)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 천황이 제정권을 가졌던 시대에는 천황 즉위시나 천재지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연호가
개정되었으나, 메이지(明治)시대 이후에는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원칙에 따라 천황이 죽어 왕위를 계승할 때만 연호를 개정토록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근래에는 서기를 병행하여 쓰기도 하지만 자국 내에서는 여전히 연호만을 고집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강해 외국인은 물론이고 일본인조차 서력
연호 사용에 혼란을 느낄 정도이다.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어떤가? 단기연호가 폐지된 지 42년.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은
3·1 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라고 되어있다. 그 3·1 운동의 이념을 보여주는 기미독립선언문에는 '조선건국 4252년 3월1일'로
밝히고 있다. 그 국통을 계승한 정부가 사실상 단기연호를 거부한 셈이다.
연호의 사용은 신라 법흥왕(536년)이 처음 사용한 이래, 나라가
강성했을 때 우리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단기연호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고려말 우왕의 사부였던 백문보였다 전하며, 단군기원을
뒷받침해주는 고문헌으로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후대의 것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통감>, 권람의 <응제시주> 등이 있다.
이후 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조선이 들어서고는 '연호는 황제만이
사용하는 것이지 일국의 제후왕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대주의 사상 때문에 대부분 중국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해 오다가 대한제국 말기 고종황제
때 광무(光武)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단기연호를 국가가 채택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948년 9월 25일 대한민국
법률 제4호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고 법제화함으로써 단군기원이 국가의 공용연호로
채택되었다.
이후 1961년 12월 2일에 단기연호 폐지법령이 선포되어 1962년 1월 1일부터는 공식적으로 단기연호 사용이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내각수반 송요찬의 단군연호 폐지의 이유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단기연호는 신화적 연혁에 근거한 것으로 독립선언서에서 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로 전통을 따랐던 것뿐이다. 둘째, 단기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제반분야에 걸쳐 많은 불편과 혼란이 야기됨에
따라 이를 근본적으로 시정할 필요가 커졌다는 것이다.
단기연호 폐지의 첫째 이유가 ‘신화적 연혁’이라 하나 단군을 신화라고 규정지은 것은
일제 침략이후지 그 이전 수천년의 우리 역사에서는 전혀 없었던 얘기다. 특히, 근래에 와서 식민사관을 탈피한 민족사학이 깊이 연구되어 고조선의
고토에서 발굴된 유물과 새로운 고조선 문헌자료의 발굴 등으로 고조선의 존재는 이미 모든 역사학계가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헌법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헌법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제9조에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했다. 3.1독립선언서는 단기연호를 썼고 홍익정신을 바탕으로 인류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대한민국정부는 헌법위에 군림하고 있는가 아니면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가?
넷째, 간도땅을 돌려받는 절차를 추진하자.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가 1909년9월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간도에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많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일본은 우리 땅인 간도를 제 마음대로 중국(청나라)에 넘겼다. 1952년 중일 양국이
체결한 ‘중일 평화조약’에 의하면 ‘중일 양국이1941년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 협약 및 협정은 무효’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1909년에 맺은 간도협약은 당연히 무효가 된다. 그리고 또한 국제법상으로도 무효라고 한다. 그렇다면 협약이전에 유효하게 존재했던 한?중간의
국경선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100년의 침묵을 거둬들이고 간도 되찾기운동을 해야 한다.
간도는 찾아야 하고, 찾을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가 우리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을 수 있었던 건 을사5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도협약을 가능하게 했던 을사5조약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 국제적인 시각이다. 1963년 UN 국제법위원회가 제출한 '조약법에 관한
빈협약'에 따르면, 강제나 협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되어 있다. 더군다나 빈협약은 위협과 강박으로 체결된 조약의 전형적 사례로
1905년 을사5조약을 들고 있다. 사실 을사5조약은 그 당시 황제였던 고종의 비준도 없이 외무대신 박제순과 내각총리 대신 이완용의 이름만으로
체결된 한·일합방 자체가 무효인 이상 이 '간도협약'도 당연히 무효인 것이다.
을사5조약이 국제법상 효력이 없다는 사실이 국제적으로도 벌써
확인되었다면 국제법적으로 우리 영토로 다시 귀속시켜야 할 땅이다. 한반도가 22만 평방km인데 간도땅은 84만 7천평방km로 거의 4배에 가까운
광활한 영토이다. 1909년 9월 간도협약으로부터 국제법상 시효만기인 100년이 이제 5년정도 남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간도를 되찾아 올
것인지 지속적이고도 꼼꼼하게 연구하여 국제사법재판소등 유엔과 관련기관에 반환청구 소송을 빨리해야 한다.
다섯째, 이 일은 오늘부터 당장
“내”가 한다고 결의를 하자.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잘못되면 남의 탓으로 돌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제주도는 3무정신을 바탕으로 한 평화의
섬으로 역사적으로 자긍심 있는 고장이다. 남 탓을 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는 제주도, 여기에서부터 세계로 우리의 기상을 새롭게 드높이는 민족혼을
되살리는 광복군이 되자. 그동안 앞장서 이일을 위해 활동해 오고 계신 제주도 ‘민족정신 광복군’이 많으시다는 말씀을 오늘 제주에 도착해서
들었다. 이 강연회를 주관해 주신 제주도 국학원장님 이하 제주도에서 활동해 오신 국학강사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존경과 격려를 보낸다.
그리고 바쁘신 중에도 참석하신 제주도민 여러분도 같은 생각으로 이일을 위해 함께 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새로운 한민족의 탄생과 지구촌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자신을 바르게 찾는 일에 ‘나’부터 나서자.
http://www.kookhak-ngo.org/datastore/ 국학운동시민연합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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