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한참 어지럽던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상경 조순(趙盾)은 허겁지겁 국경을 향해서 수레를 몰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조정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서 절대 권한을 행사해 오던 그였으나, 어리석고 포악한 임금에게 쫓겨 목숨조차 보전키 어려운 신세로 바뀐
것이었다. 국외로 탈출하는 처량하고 고단한 길에는 아들 조삭만이 수행할 뿐 누구하나 뒤따르는 자도 없었다.
드디어 수양산 근처까지 왔다. 이제 저 산만 넘으면 다른나라 땅이다. 그들이 겨우 한숨을 돌리려는데 멀리 수양산 쪽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한떼의 군마가 있었다.
“어서 피하십시오”
달려오는 군마를 먼저 발견한 아들이 황급히 수레를 숲속으로 몰았으나
조순은 별로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괜찮다! 저들은 강성 쪽이 아니라 수양산 쪽에서 오는 사람들이니 오늘의 일을 모를 것이다.”
“그렇더라도 숨는 것만 못합니다. 나뿐 소식은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보다 더 빠르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간곡한 말에
조순도 어쩔 수 없이 몸을 숨겼다.
드디어 한 떼의 사람들이 그들이 숨어있는 곳을 지나쳐 갔다.
그때 조순이 맨 앞에서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을 보고 소리를 지른다.
“조천이 아니냐?”
말을 타고 가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놀란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상경이 국경 근처에 있는 산 속에 숨어 있을 줄이야!
맨 앞에서 일행을 이끌고 가던 사내가 황급하게 말에서 내리더니 조순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다가와 땅에 엎드린다.
“숙부께서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조순은 꿇어 엎드린 사내와 그를 따라오는 한 떼의 무사들을
보았다. 무사들도 일제히 말에서 내려 꿇어 엎드린다.
“조카, 나좀 보세!”
땅에 엎드렸던 조천이 숲 속으로 들어왔다.
조순이 그의 귀에다 입을 대고 뭐라고 말하자, 그는 너무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금방 평정을 되찾고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며 일행을 향해서 소리친다.
“잠시 쉬었다 갈까하니, 너희들은 앞서 가다가 객관에서 기다리도록 하여라!”
부하들을 먼저
떠나보낸 조천은 곧 숙부와 마주 앉았다.
조순은 조카에게 그 날 강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들려 주었다. 임금 이고가 포악 무도하다는
사실은 조천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새삼스럽게 설명할 것도 없었다.
임금이 대신들이나 백성으로부터 원망을 들어온 것도, 또한 바른 말로
간하는 조순을 죽여 없애려 한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어서 당시 병권을 관장하는 사마(司馬) 자리에 있던 조천으로서는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사실 이고를 임금자리에 올려 모신 사람은 조순이었다. 이고가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매사를
조순에게 의지했으나 그 후 나이가 들어가자 차츰 조순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겼다. 그도 그럴것이 임금은 아직 미소년 티가 가시지 않은 도안가라는
신하와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데 그럴 때 마다 조순이 간하기 때문이었다.
이고는 도안가로 하여금 도성 안에다 어마어마한 정원을 꾸미게하고
그곳을 도원이라 불렀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도원에다 다시 3층 누각을 짓고 화려하게 치장했다. 그 후 정사는 뒷전이었고 도안가를 거느리고 그곳
누각에 올라가 놀기를 좋아했다.
하루는 임금과 신하가 누각에 올라 탄환으로 새를 쏘는 놀이를 하다가 그것도 싫증이 났다.
“이럴
것이 아니라 담 바깥에서 구경하는 백성을 쏘아 맞추기로 하자! 새를 쏘는 것보다야 살아 움직이는 백성을 쏘아서 맞추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지
않겠는가?”
임금의 터무니 없는 제안에 도안가는 말리기는커녕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임금과 신하는 백성을 향해서 탄환을 쏘았다.
난데없는 탄환에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것을 본 임금이 소리를 지른다.
“궁수들은 무엇을 하는가? 저
놈들이 도망을 못가게 활을 쏘아라!”
임금은 그들이 달아나자 심통이 났던 것이다. 그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도망쳤다.
임금의 빗나간 행실에 참다 못한 신하들이 간했으나 임금은 들은척도 하지 않을뿐더러 툭하면 조회도 열지 않았다.
하루는 조순이
조당에서 사회라는 대부와 국사를 논의하는 중인데, 두명의 여관(女官)이 대나무로 만든 채롱을 들고 내궁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서두르는 것이
왠지 수상쩍었다.
조순과 사회가 달려가 그들이 매고 나오는 채롱을 들여다보다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토막을 낸 시체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먼저 정신을 차린 조순이 여관들에게 호령을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실직고 하렷다! 헛말을 하면 너희들부터
참하겠다!”
여관들은 벌벌떨며 아뢴다.
“이것은 포인(疱人, 조리사)의 시체입니다. 어젯밤에 상감께서 급히 곰의 발바닥
요리를 먹고 싶다는 영을 내리셨습니다. 포인은 곰의 발바닥을 삶으면서 한편으로는 술상을 차렸습니다. 상감의 재촉이 심하므로 포인은 정신없이
술상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상감께서 먹어보시더니 곰의 발바닥이 제대로 익지 않았다면서 크게 노해서 들고 있던 구리쇠로 포인을 쳐죽였습니다.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상감을 가까이 모시는 몇몇 여관들과 내시들만 그 사건을 알았습니다. 상감은 이 일이 알려지면 신하들이 시끄럽게 들고
일어날 것이라면서 몰래 시체를 버리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조순과 사회는 참혹하고 끔직한 광경에 할말을
잊었다.
두 사람은 임금에게 간언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사회가 먼저 궁으로 들어갔다. 그간 간해서 듣지 않으면 조순이 그 뒤를 이을
참이었다.
사회가 들어오는 것을 본 임금은 억굴을 찡그렸다.
“저 자가 듣기 싫은 소리를 할 모양이로구나!”
임금이 먼저
선수를 쳤다.
“과인이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니 대부는 아무 말 마라!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로다.”
임금이 먼저
사과를 하니 사회도 어쩔수 없었다.
“이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상감께서 실수를 뉘우치시니 사직을 위해서 큰
다행입니다.”
사회는 궁에서 물러나와 조순에게 임금을 만난 전말을 들려주었다.
"주상께서 잘못을 고치겠다고 하시니 기다려
봅시다!"
그들은, 앞으로는 잘되겠지 하는 기대감을 안고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조당에 나갔더니 조회를 열지 않는다는 하교가
내렸다. 대신들이 웅성거리면서 돌아갈 차비를 차리는 중인데, 임금은 벌써 도원으로 행차를 하는 것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소! 내
오늘은 목숨을 내놓고 간할 것이오!”
조순은 도원으로 달려가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간했다.
“신 조순은 죽을 죄를 무릅쓰고
감히 아뢰나이다!”
조순이 간절한 어조로 간하자 임금이 간청을 한다.
“경은 물러가오. 과인이 오늘 하루만 도원에서 놀고, 궁으로
돌아가는 즉시 경의말에 따르 리다!”
조순도 완강하게 버텼다.
“안 됩니다! 당장 돌아가십시오!”
곁에서 도안가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는다.
“주상께서 그토록 말씀하시니 상경께서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내일은 틀림없이 조당을열도록 소인도
아뢰겠습니다.”
다시 한번 임금으로부터 다음 날은 반드시조당을 연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소준은 할 수 없이 물러 나왔다.
그 날
임금은 도원에서 놀면서도 신바람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도안가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둘은 조순을 제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조순이 살아있는 한
그들이 마음대로 즐길 수 없던 것이다.
도안가가 계책을 내놓았다.
“신이 데리고 있는 사람 가운데 서여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많은 신세를 졌기 때문에, 신이 무슨 일을 시켜도 잘 듣습니다. 상감께서 허락하시면 그 자를 시켜 조순을 죽여 없앨까 합니다만.....”
“성사되면 그대의 공로를 잊지 않을 것이니라.”
그 날 밤 도안가는 서여를 불러 분부를 내렸다.
“상경 조순이 마음대로
국사를 독단하므로 상감께서 그를 죽여 없애라는 밀지를 내리셨네. 그대는 오늘밤 상경의 저택으로 숨어들었다가 새벽에 조순이 입궐할 때 비수로 찔러
죽이게! 알겠나?”
서여는 비수를 품고 조순의 저택으로 숨어들었다.
새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둥둥 울리자마자 저택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문이 활짝 열였다. 서여는 살금살금 중문으로 들어가 당상을 바라보았다. 당상에는 조순이 관복을 차려입고 조관을 쓰고 홀을 손에
들고 단정하게 앉아서 입궐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날도 새기 전에 입궐하기 위해서 분주히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는 조순의 모습을 보고 서여는
가슴이 찡했다.
“국사를 위해서 저렇듯 노심초사하는 상경을 어찌 죽인다는 말인가! 하지만 임금의 밀지를 받았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서여는 마침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나무에다 머리통을 짓이겼다.
“임금의 분부를 어길지언정 차마 충신을 죽일 수 없어
이몸은 이렇게 죽습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
말이 끝나는 것과 함께 머리통이 으깨어지면서 서여는 숨을 거두었다.
그 날 여러
사람들이 아무리 힘써 말려도 조순은 입궐했다.
“살고 죽는 것은 천명인데, 무엇을 두려워 한다는 말인가? 상감께서 부르시는데 입궐하지
않는다면 불충을 면할 수 없다.”
조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금은 골치가 지근지근 아파왔다. 그 날의 조회가 이럭저럭 파한 뒤에,
도안가와 임금은 또다른 꾀를 짜냈다.
다음 날 조당에서 일대 난전이 벌어졌다. 임금이 무사들을 매복시켰다가 조순을 찔러 죽이게 한
것이었다.
조순을 모시는 제미명이 목숨을 내놓고 조순을 지키다가 무사들의 칼에 찔려 죽었다. 조순은 그 틈을 타서 겨우 조당에서 도망쳐
나왔다.
조순의 설명을 듣고 조천이 위로한다.
“저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수양산에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래서 오늘
조당에서 있었던 불상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숙부께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것은 모두 제 불찰이오니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무엇고바 숙부께서 나라를 떠나시면 앞날이 걱정입니다. 그러니 우선 국경 바깥으로는 나가지 마시고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머지않아 좋은 소식을
보내 드릴 것이니 그 때에 앞일을 경정하십시오.”
“그렇다면.....”
상경 조순이 구경 근처에서 시간을 끌면서 지체하는 동안
사마 조천은 강성으로 돌아갔다.
조순으로부터 조당에서 일어난 불상사를 듣고 강성으로 돌아온 조천은 임금을 시해할 속셈으로 임금의 마음을
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하들을 충동질했다.
결국 진나라 임금 이고는 조천의 농간으로 피살되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조천의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도 그를 욕하지 않았다. 이고는 본디 포악한 임금이었고, 백성은 그 임금 밑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고생을
해왔으므로 오히려 임금이 시해된 것을 은근히 기뻐했다.
이렇게 해서 신하들에 의해서 시해된 이고는 영공(靈公)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자기
명에 죽지 못하고 비명에 죽은 임금은 죽은 뒤에 영공이나 애공(哀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임금이 시해되었다는 비보를 전해들은 도안가는
타국으로 도망을 쳤다. 조순과 신세가 뒤바뀐 것이다.
조천은 국경 근처에 머물고 있던 숙부를 불러들였다. 조순이 수레를 타고 강성으로
되돌아오자 문무백관이 조당으로 모여들었다. 조순은 이들와 상의해서 죽은 임금을 장사지내고 새임금을 세웠으니, 이가 성공(成公)이다.
성공은 나라의 정사를 조순에게 일임했다. 조순은 새임긍에게 청해서 자신의 이복 동생들에게도 대부 벼슬을 내리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상경
조순은 전보다 더한 권한을 쥐게 되고, 조천은 전처럼 사마 자리에 앉아 군권을 행사했다.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영공이
시해된 사건도 이럭저럭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하게 사라져 갔으나 조순의 마음 한 구석은 늘 그것으로 어두웠다.
참다 못한 조순은 어느 날
사관(史官)인 동호(董狐)를 불렀다.
“지난 가을에 있었던 일이 사초에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그것을 좀 보고 싶소!”
동호가
내놓는 사초를 보고 조순은 기절초풍했다. 사초에는 이렇게 씌어있었던 것이다.
<9월 을축 일에 진나라의 조순이 임금
이고를 죽이다>
이럴 수가! 내가 임금을 죽였다고?
“이 기록은 잘못 되었소. 그 때 나는 피신 중이어서 임금이 피살되는
것을 몰랐소. 그런데 내가 임금을 시해했다고 썼으니 이럴 수 있소? 후세 사람들이 이 기록을 본다면 뭐라 하겠소? 그들은 사정을 잘 모르면서
내가 정말로 임금을 죽인 것으로 알터이니 이 기록을 고쳐주오.”
그러나 동호는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그대는 상경의 신분으로
달아났다고 하지만 국경을 넘지 않았으며, 돌아와서는 임금 죽인 자를 찾아내어 죄를 묻지 않았으니 책임은 결국 그대가 질 수밖에 없소이다.
그러므로 임금을 죽인 사람은 그대라고 썼소.”
“나는 임금을 죽이지 않았소. 없는 일을 사초에 올린 죄를 물어서 그대를 죽여야겠소!
그러니 죽기 싫거든 이 사초를 고쳐주오.”
동호는 완강하다.
“안 될 말이오.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기록은 고칠 수
없소!”
조순으로서는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살리고 죽이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막강한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곧은
붓은 꺾을 수 없음을 안 사람이었다.
그는 그 후로 더욱 조심하고 조심해서 훌륭한 재상 노릇을 했다. 또한 자신의 조카이며, 그를
다시 권좌에 앉히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조천에게도 사사로운 정을 주지 않았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동호직필(董狐直筆)이라한다.
목숨을 걸고라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참다운 사관의 곧은 붓은 이렇게 무섭다.
이런 일이 있고 얼마 뒤에 제(齊)나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신하가 임금을, 아우가 형을 죽이거나 몰아내는 어지러운 세상이므로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제나라의 임금 장공이
임금 자리에 오르는 데에는 최저와 경봉이라는 두 신하의 힘이 컸다. 때문에 임금은 두 사람을 다 같이 상경으로 삼았다. 제나라에서는 신하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몇 자리를 다 같이 상경이라고 불렀다.
그 때부터 최저와 경봉이 나라의 정사를 좌지우지하니 임금은 허울만 그럴 듯
했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임금은 심심할 때면 이들의 집에 행차해서 함께 즐겼다. 임금과 신하가 한 자리에서 술도 마시고, 음악도 듣고,
어떤 때는 활쏘기 내기를 하기도 했다. 자연히 임금과 신하 사이에 거리낌이 없었다.
어느 날, 임금은 최저의 집에 행차해서 여느
때처럼 술자리를 벌였다. 한참 거나할 무렵, 최저가 아랫사람을 불러서 뭐라고 귀엣말을 했다.
잠시 후 주렴이 걷히면서 여인 하나가
술자리로 들어섰다. 임금은 그 여자를 보는 순간 넋을 잃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궁녀들의 치마폭에 묻혀 사는 임금이지만 그 같은 미인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녀에 비하면 궁녀들은 여자도 아니었다. 거나하게 주기가 올라서 실제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겠지만 그녀는 사실
임금도 놀랄 만한 여인이었다.
“당강이 문후 드리나이다!”
임금 앞에서 날아갈 듯 절을 하면서 아뢰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곱고
아름다운지 옥쟁반에 은방울 굴러가는 소리보다 더 맑고 깨끗하다. 임금의 혼은 벌써 달아나 버렸다.
“당강이라?”
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최저가 흐뭇한 얼굴로 아뢴다.
“당강은 이 집의 안주인이자 소신의 내자입니다.”
“아, 그렇소?”
임금음 다소
실망했다는 어조로 말했다. 천하절색 미녀를 만났는데, 최저의 아내라고 하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의 아내라면 임금인들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최저의 아내가 아닌가.
최저가 이번에는 아내더러 말한다.
“주상께 술을 따라 올리지 않고 뭘
하오?”
당강은 얼굴을 붉히며 술잔에 술을 가득채워 임금에게 올리며 축수했다.
“이 술을 드시고 만수무강하소서!”
그렇게해서 장공과 천하절색 당강이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했다. 최저가 아내를 불러내어 임금한데 술을 따르게한 것은 특별한 저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술자리의 취흥을 돋우고, 또한 아내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서였다.
여하간 임금은 최저의 집에서 대취해서 궁으로 돌아왔고,
궁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눈앞에 당강의 아름다운 모습이 어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임금은 심복을 시켜서 당강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오게
하였다.
당강은 본래 당공한데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최저의 후처로 들어왔다. 그래서 당강이라고 불린다. 당공이
병으로 죽었을 때 최저가 문상을 갔다가 망인의 아내 당강을 보고 반했다. 소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한 떨기 애련한 수선화였다. 때마침 최저도
상처를 해서 홀아비로 살 때였으므로 미망인한데 청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였다.
최저는 기회를 엿보다가 당강의 오라비
동곽언을 구워삶았다. 동곽언이 힘써 권하고, 또한 최저가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권력자이므로 당강은 모른 체하고 구혼을 받아 들였다.
그녀는 용모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잠자리의 맛도 유별난 여인이어서 최저는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 최저는 전남편에게서 낳은 당무구와
오라비 곽동언도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당강은 최저에게 시집와서 다시 아들을 낳았는데, 최저는 그 아들의 이름을 최명이라 지었다. 물론
최저에게는 전처가 낳은 아들이 있었지만은 당강이 낳은 아이가 크면 장차 그 아이를 자신의 적자로 삼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최저를
뇌살시켰던 당강이 이번에는 임금의 정신을 빼놓았다.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 소상하게 안 임금은 어떻게 하든 그녀를 손에 넣기위해 노심초사 그
방법을 궁리한 끝에 최저가 쓴 수법을 다시 쓰기로했다.
임금은 최저처럼 동곽언을 사이에 넣고 당강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임금은 철따라 남매에게 선물을 내려서 여자와 뚜쟁이의 환심을 동시에 샀다.
당강은 결국 임금에게 몸을 허락했다. 최저는 임금과 아내사이에
그런 불미스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임금은 구실만 있으면 최저의 집으로 행차해서 당강과 은밀하게 정을 통했다.
하지만 아무리 은밀하게 하는 짓이지만 마침내 최저도 눈치를 채고 당강을 위협했다.
당강은 임금이 강제로 협박하므로 여자의 몸으로 어쩔수
없었다고 변명을 했다. 임금에게 아내를 보였던 것이 잘못이었다. 최저는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두고보자!
최저는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상대가 임금이므로 당장에는 어쩔 수가 없어서 질투와 복수심으로 괴로워했다.
그 후로도 임금은
수시로 최저의 집에 나타났고 그때마다 그는 적당한 구실을 달아서 자리를 피했다. 임금은 눈치도 모르고 그가 자리를 피해주는 것만을 반갑게
생각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서 생각할 힘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어느날, 임금은 외국 사신을 접대하려고 북곽에서 잔치를 베풀었으나 최저는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임금을 모시는 가수라는 자한데 사람을 보내어 임금의 동정을 알아오게 했다. 가수는
본디 최저의 심복이었다가 궁으로 들어가 임금을 모시는 자였다.
가수로부터 전갈이 왔다.
“주상께서는 잔치를 파한 다음에 대감을
문병한답니다.”
문병한답시고 아내와 재미를 볼 작정이로구나!
최저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아내를 불렀다.
“오늘은
남의 아내와 간통한 무도한 임금을 죽일 작정이다. 네가 만약 시키는 대로 한다면 지금까지의 추행은 없던 것으로 덮어두고 네가 낳은 아들을 적자로
삼겠지만 말을 듣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서 너와 내가 낳은 자식부터 처치한 다음에 임금을 죽이겠다.”
최저의 눈에서는 질투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아내는 울면서 호소했다.
“여자란 남편의 명에 따를 뿐이어요!”
당강의 맹세를 받은 최저는 곧 동곽언과 당무구를 비롯한
여러 가신들을 불러서 거사할 것을 의논한 다음, 무사들을 매복해 두었다.
임금은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잔치를 파한 후 최저의 집으로
행차했다. 듣던 바대로 최저는 병이 위중해서 마중하지 못하고 사랑채에서 자고 있다고 한다. 임금은 곧바로 내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당강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 당강!”
임금은 당강을 보자마자 껴안았다. 최저가 병이 위중해서 사랑채에서
자고 있으니 눈치볼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강을 껴안고 임금은 헐떡거리면서 옷을 벗기려 했다. 당강은 좋은 말로 달래지만 마음이 급한
임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때 시비가 들어와서 아뢴다.
“대감께서 꿀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십니다.”
막 재미를 보려고 하는
참에 그 말을 들으니 임금은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강이 몸을 빼면서 나직히 속삭인다.
“꿀물을 내간 다음에 얼른 돌아올 테니
잠시만.....”
아쉽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당강은 시비와 함께 나가고, 임금은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나간 자리에는 여인의 체취만이 남아서 임금의 혼을 앗아갔다.
이제나 그녀가 돌아올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복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임금은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깥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가수를 불러오너라!”
그러나 가수도 얼른 들어오지
않았다. 최저와 내통한 가수가 들어올 리가 없다.
불안해진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무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최저가 미리
매복해 두었던 무사들이었다. 임금은 변이 났다는 것을 직감하고 방문을 박차고 뛰어 나가려 했지만 문은 이미 잠겨져 있었다.
“대감의
명이시다! 음탕한 도적을 잡아 죽여라!”
그 날 최저가 몸이 아프다고 한 것도, 또한 시비가 들어와서 대감이 꿀물을 마시고 싶다고 아뢴
것도 모두가 사전에 모의했던 각본에 의해서였다.
여하간 그 날 장공은 최저의 가신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최저는 즉각
임금이 학질로 죽었다고 공포하고 대신들을 조당에 모은 다음에 뒷일을 의논했다. 대신들을 불러 모으기에 앞서 경봉과 상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하들은 최저가 임금을 시해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감히 아무 말도 못했다. 경봉이 최저를 비호하고 나서니 힘이 없는 대신들로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최저와 경봉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조당을 포위한 다음 평소 장공과 특히 가깝던 자들을 모조리
쳐죽였다. 그리고 왕자 저구를 새임금으로 받들어 모셨다.
새임금은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므로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은 여전히 두 실력자
최저와 경봉이 처리하고, 임금은 죽은 장공보다 더한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최저와 경봉은 2대에 걸쳐서 임금 자리를 안정시켰다는 공로를 내세워
더욱 위세를 부렸다.
조정이 안정을 되찾고, 죽은 장공에 대한 기억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희미해져 모두들 잊어가지만 최저는 임금을
죽인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후세에까지 자신이 임금을 죽인 난신으로 기록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는 태사(太史) 백(伯)을 불렀다.
제나라에서는 사관을 태사라 부른다.
“실록에다 장공이 학질로 죽었다고 써라!”
얼마 뒤 최저가 다시 태사를 불러 분부한 대로
썼는가를 확인 했더니 백은 실록에다 이렇게 써놓았다.
<5월 을해 일에 최저가 임금 광(光)을 죽였다>
실록을 본 최저는 노해서 펄펄 뛰었다.
“이 놈을 쳐죽여라! 태사란 자가 있지도 않은 일을 함부로 꾸며서 썼구나! 학질로
죽은 임금을 내가 어떻게 시해했다는 말이냐?”
태사 백은 격노한 최저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백이 죽자, 그의 동생 중(仲)이
태사 자리를 이어 받았다. 최저는 중에게도 같은 부탁을 했으나 중 역시 형이 쓴 것과 똑 같이 썼다.
“네 놈도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그래, 죽고 싶다면 얼마든지 죽여주마!”
그렇게 해서 중도 죽었다.
중이 죽자, 그 다음 동생 숙(叔)이 태사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역시 죽은 두 형이 쓴 것과 똑 같게 썼다. 최저는 숙마저 죽여버렸다.
이번에는 막내 동생 계(季)가 태사가 되었다.
최저가
계를 불렀다.
“장공의 일을 기록한 대목을 보자!”
계가 내놓는 것을 본 최저는 기가 막혔다. 계 역시 같은 말을 쓰지 않았는가.
“너의 형들이 모두 이 일 때문에 죽었다. 그러함에도 너는 같은 말을 썼다. 생명이 아깝지 않느냐? 내가 시키는 대로 쓴다면 살려줄
것이니 쓸데없는 고집은 그만두고 사초를 고치도록 하여라!”
계는 대답했다.
“사실을 바른 대로 기록하는 것이 역사를 맡은
사람의 직분이오. 직분을 저버리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소. 옛날에 진(晉)나라의 영공이 죽임을 당했을 때, 동호는 ‘조순이 그의 임금
이고를 죽였다’ 고 썼으나 조순은 그 사초를 보고도 동호를 어쩌지 못했소. 사실 그때 영공을 죽인 사람은 조순이 아니고 그의 조카 조천이었지만
조순이 진나라의 상경으로 있었기 때문에 동호는 임금을 죽인 죄를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조순에게 물었던 것이오. 조순이 왜 동호를 죽이지 않았는지
아시오? 권력으로도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직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오. 지금 내가 이것을 쓰지 않더라고 천하에는 이
사실을 바른 대로 기록할 자가 또 있을 것이니, 결국 상경이 저지른 죄는 감추어지지 않을 것이오. 감추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사람들의 비웃음만
살 것이니 나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오!”
최저는 계가 쓴 기록을 던지며 탄식했다.
“나는 사직을 바로 잡기 위해서
부득이 무도한 임금을 죽였다. 아무리 네가 사실대로 기록한다 해도 사정을 아는 사람은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계는 최저가 집어던진
사초를 주워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남사씨(南史氏)가 멀리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계는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이렇게 바삐 오오?”
남사씨가 대답한다.
“나는 그대 형제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번 5월에 있었던 을해사건이 혹시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걱정되어 그것을 기록하려고 이렇게 달려오는 중이오!”
남사씨의 손에는
대나무를 쪼갠 죽간이 들려 있었다.
계가 들고 있던 사초를 보여주자 남사씨는 비로소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참 세상이
어지럽던 때였으므로 그런 사건이 진(晉)나라와 제나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거푸 일어났다. 정(鄭)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나라의
대부 송은 임금을 죽일 목적으로 당시의 최고 집권자이던 귀생을 찾아가서 협력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귀생은 응하지 않았다.
송은
귀생을 위협하기 위해 거짓 소문을 퍼트렸다.
“귀생이 임금에게 불칙한 마음을 먹고 있다!”
날조된 소문이 퍼지자 당사자인 귀생은
두려웠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 소문이 임금의 귀에 들어가면 의심받게 될 것이다.
“송을 불러오너라! 그가 사람을 죽이려 하는구나!”
송이 오자 귀생은 따졌다.
“그대는 나를 죽일 참인가? 무슨 심사로 있지도 않은 소문을 퍼트리는가?”
그러나 송은
태평이다.
“상경께서 나의 말을 듣지 않으니 난들 어찌하겠소?”
결국 귀생은 적극적인 가담의 뜻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
일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겠다고 했다. 알아서 하라는 암묵적인 응낙이었다. 그는 원래가 나약하고 겁 많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송은 귀생이
적극적으로 가담은 하지 않더라도 방해는 않으리라 확신하고,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임금이 태묘에 제사를
올리는 밤에 송은 부하들을 시켜 잠자는 왕을 암살하고, 임금이 급살로 죽었다고 공포했다. 그것이 송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잘 알면서도 귀생은
모르는 척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서 나라의 정사를 도맡아했고, 그것으로 만족해했다.
뒷날 ‘춘추(春秋)를 집필하던 공자(孔子)는 이
대목에 이르러 이렇게 기술했다.
<정나라의 귀생이 임금 이(夷)를 죽였다>
공자는 직접적인 하수인이던
송이라는 신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임금을 죽인 죄를 귀생 한 사람에게로 돌렸다. 귀생으로서는 억울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이든 죄는 최고 집권자에게 있다는 것이 공자의 판결이다. 묵시적인 가담이나 방조의 경우에도 가장 윗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으니 그 자리는 그래서 더욱 어렵다.
직필거사라는 닉네임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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