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중년들
“쉘 위 댄스? 스탭을 밟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중년층의 춤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과거처럼 일부 계층의 일탈행위가 아니다. 영화 ‘쉘 위 댄싱’의 주인공처럼 우리시대의 중년층은 춤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 춤을 통해 인생을 새롭게 발견하고, 머지않아 다가올 황혼을 준비하는 것이다.
느릿느릿 플랫폼으로 들어서는 퇴근길 지하철. 으스름 저녁, 차창 너머로
비치는 검푸른 하늘 아래 별처럼 드문드문 외로이 떠 있는 도심의 네온사인들…. 흔들리는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중년남자의 초점 잃은 시선이 무심히
흘러가던 창 밖 어딘가에 머물며 한순간 생기로 빛난다.
허름한 건물 2층, ‘견학자유’ 안내문구가 걸린 댄스교습소. 창가엔 텅 빈 공간을 뒤로 한 채 하릴없는 눈길로 거리를 응시하고 있는 여인의 아름다운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희미한 불빛 아래 홀로 춤을 추는 마이, 40대 경리과장 스기야마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린다.
아내와 아이, 평생토록 발목을 잡고 있을 것만 같은 서류더미 위의 숫자놀음…. 소박한 성공 뒤에 가려진, 청춘을 지나온 삶의 피로와 허탈감이 짙게 밴 중년의 후줄근한 일상. 달리는 지하철을 뒤로 한 채, 스기야마는 마이를 통해 ‘춤’과 ‘일탈’의 행로에 몸을 싣는다.
직장동료이자 라틴댄스 신봉자인 아오키, 억척스레 살아가는 시장 아줌마 토요코, 자신과 비교해도 고만고만한 인생을 걸어왔을 또다른 샐러리맨들. 일탈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부대끼며, 꿈도 생기도 없이 지루하게 흐르던 스기야마의 ‘인생시계’는 어느새 ‘댄스스탭’처럼 빨라지기 시작한다. “Shall we dance?”
주인공 스기야마가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은 저녁 시각, 서울 강남의 한 댄스교습소에서 스기야마와 비슷한 연배의 남녀 10여명과 마주쳤다.
“투 쓰리 차차 원∼”
“투 쓰리 아웃 원∼”
“턴 앤 투!”
“따라라라∼뒤로 투!”
“투 쓰리 차차 원, 투 쓰리 차차 원∼”
“지현 엄마, 시선 두리번거리지 마세요.”
“김선생님, 어깨 힘 빼시고…. 그렇지, 잘 하시네요.”
“코로 숨을 쉬세요. 입으로 숨을 쉬면 자이브 한 곡 뛰고 기진맥진합니다.”
“종아리에 힘이 가는 춤을 추면 안됩니다. 허벅다리로 눌러 줘야죠, 이렇게∼”
“룸바는 스탭에서 체중이 완전히 앞으로 나갑니다. 차차차는 뒤에 체중이 약간 남아야죠. 좋아요, 다시 한 번∼”
댄스교습소에 50대가 몰린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강사의 날카로운 지적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수업시간. 얼핏 보기에도 쉽지 않은 춤동작을 따라 가느라 몸 전체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이사장님, 턴할 때 왼쪽 다리 흔들지 마세요. 남자가 다리에 힘없다는 소린 듣지 말아야지….”
순간 중년의 수강생들 사이에 왁자한 웃음이 터지고, 팽팽하던 수업 분위기가 일시에 풀어진다.
사방 벽이 거울로 된 연습장 한편 소파. 그들이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넥타이와 양복상의, 여성 핸드백, 신발들이 뒤엉켜 있다. 그 틈에서 댄스교습 시간에 맞춰 서둘러 나오느라 일거리를 챙겨왔을 법한 중년남성의 낡은 서류가방이 눈에 띈다.
“스탭을 끌면서 시선 처리를 잘못하니까 자꾸 여성을 잡아당기게 됩니다. 시선은 정면을 보시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 안됩니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강사의 매서운 꾸중에 한 50대 초반 남성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서 있다. 그의 이마에는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강습이 끝나고 땀을 식히던 50대 남성은 “자그마한 사업체를 꾸리고 있다. 춤을 배운 지는 5개월 정도 됐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지금 20∼30대와 달리 우리는 남녀가 함께 손을 잡고 춤추는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하다. 거기다 몸은 굳었지, 파트너인 여자 얼굴이 코 앞에 있는데 어떻게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춤출 때마다 쑥스럽고 어색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며 얼굴을 붉힌다.
그는 “그래도 처음보다 한결 나아졌다. 그땐 손도 다리도 다 후들후들 떨리고, 수업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로 자신을 위로한다. 50을 넘긴 나이로, 안 배워도 그만일 춤에 뛰어들어 강사의 ‘야단’까지 듣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자주는 아니지만 직원들하고 회식할 때 사장이랍시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으니까 영 분위기도 썰렁하고 직원들한테 미안했다. 젊은 직원들하고 같이 섞여 놀 줄 알아야겠다 싶어 춤을 배우게 됐다.”
50대 중반 주부는 결혼한 딸과 사위의 성화에 떠밀려 7개월 전 이곳을 처음 찾았다고 한다. “이 나이 여자들 갱년기 우울증 앓는다더니 내가 그걸 실감했다. 밥맛도 없고 쇼핑을 다녀도 심드렁하고, 매사 관심 가는 게 없고 귀찮기만 했다. 사위가 학원도 알아보고 수강료까지 챙겨줘서 마지못해 시작했는데 요즘은 춤이 없으면 사는 낙이 없을 것 같다. 매일 교습소 가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생활에 활력이 생겨서 좋다”며 밝은 표정을 짓는다.
“남편이 살아 있다면 싶다. 댄스 스포츠는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가 있어야 함께 즐기면서 빨리 배울 수 있다. 부부가 나란히 와서 땀 흘리는 광경을 보면 나도 모르게 부러운 심정이 된다.”
남편 대신 같이 춤출 수 있는 남자친구라도 하나 만들어야 할 모양이라던 그가 때마침 ‘삼바’ 음악이 나오자 경쾌하게 몸을 일으켜 플로어로 나간다.
춤의 기본은 파트너와의 호흡
강남의 다른 댄스교습소에서 만난 홍경식(49)·변종진(47) 부부는 함께 춤을 배운 지 2년 남짓 됐다. “아내가 당뇨로 심하게 고생했다. 병원에서 유산소 운동을 하라고 해서 처음에는 아내 혼자 에어로빅을 배웠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이 없을까 고민하다 댄스스포츠에 입문했다.”
아내 덕분에 인생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홍씨. 그는 “춤을 배우기 전에는 골프에 빠져 있었다. 사업상 필요하다는 구실로 주말마다 혼자 취미생활을 즐긴 셈이다. 우리 연배 남자들이 노는 게 뻔하지 않나. 그저 모이면 술 마시고 화투치고 노래 부르고…. 춤을 배운 뒤로 술은 와인 한 잔 정도만 마시고, 담배는 완전히 끊었다. 담배 피고 술 마시면 폐활량이 줄어 춤추는데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또 아내 건강도 몰라보게 좋아져서 가정생활에 윤기와 활력이 생겼다”고 말한다.
홍씨 부부는 요즘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행복해진다.
“나비넥타이에 턱시도를 차려 입고, 파티복을 입은 아내와 대문을 나설 땐 정말 행복감에 휩싸인다. 춤이 아니었다면 언제 그런 기회가 있겠는가. 파티장에서 음악이 나오면 아내와 왈츠를 추고 와인도 마시고…. 지난 연말에는 직원들 앞에서 그동안 배운 춤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준 일도 있다. 춤을 배우면서 터득한 인생의 지혜가 있다.
부부 어느 한쪽이 상대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남자들이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하기는 어려운 일 아닌가. 아내와 함께 춤을 출 때 ‘나는 운전자, 아내는 차’라는 기분으로 춘다. 남자가 리더가 되어 호흡을 맞추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운전자와 차가 호흡이 안 맞으면 사고밖에 더 생기겠는가.”
한편 동아문화센터 ‘토요모임’에서 만난 재미동포 사업가 김경호(48) 씨는 “장기출장 온 길에 이곳에서 3주째 볼룸댄스 강습을 받고 있다”고 한다. 현재 미국 보스턴에 거주하는 김씨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년쯤 전이다. 미국에서 볼룸댄스 프로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아내의 권유가 계기였다.
“미국인가족댄스클럽연맹인 ‘마사바다(massabada)’ 보스턴지부가 있다. 이곳에서 봄·가을로 워크숍을 여는데 한 번에 몇만명씩 몰린다. 아내를 따라 참석해도 내가 춤을 못 추기 때문에 아내가 다른 파트너와 춤추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각종 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항상 가방을 들어다 줬다. 미안했던지 아내가 함께 춤을 추자고 해서 배우게 됐다.”
춤을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김씨는 이상한 마력이 생겨 마치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살면서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고. 그는 볼룸댄스를 함께 추어보면 상대방의 성격을 금세 파악하게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음악에 빠져 한창 감정을 잡고 춤을 추는데, 갑자기 고난도 테크닉을 구사해 파트너를 당황시키거나 감정 흐름을 깨뜨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사교춤에서 올림픽 종목까지
그는 “춤추다 다투는 커플이 많은데 아마 춤이 사람의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아내와 춤을 출 때 자주 다툰다. 아내보다 내가 서툴 수밖에 없고, 그러다 아내가 이런저런 요구와 조언을 하면 때로 감정이 상해 충돌한다. 부부사이에 감정소통이 껄끄러우면 이상하게 호흡이 맞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가끔 티격태격 다투면서 춤을 추더라도 지금 아내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김씨. “혼자 춤추니까 영 재미가 없다. 그래도 열심히 실력을 쌓아 가서 미국에 있는 아내에게 자랑하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매주 토요일 오후 4시경이면 김씨처럼 동아문화센터에서 댄스스포츠를 배우는 회원들이 하나둘 ‘토요모임’에 얼굴을 내민다. “평균 20∼30쌍이 춤을 추러 온다. 그 중에는 부부도 있고, 혼자 오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다 회원이니까 알아서들 파트너를 찾아 함께 즐긴다. 강습시간이 아니니까 분위기도 자유롭고 화기애애하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춤을 통해 건전하게 사귀기 때문에 회원들이 좋아한다”고 귀띔하는 댄스강사 박효씨. 82년부터 이곳에 몸담아온 박씨는 얼마 전 프로 댄스선수 생활을 마감한 국내 스포츠댄스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우리 회원이 9백명 정도 된다. 이중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연령층이 가장 많다. 남녀 비율은 엇비슷하다. 춤을 배우러 오는 중년남성이 2∼3년 전과 비교할 때 엄청나게 늘었다. 아마 댄스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전세계 공식 명칭이 ‘댄스스포츠’로 통일된 일명 ‘사교춤‘은 ‘제비족’ ‘카바레’와 더불어 우리나라 50∼80년대 퇴폐문화의 상징으로 아직도 많은 중·장년 층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 중심에 50년대 중반 우리사회를 발칵 뒤집은 ‘희대의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이 있다. 훤칠한 외모와 빼어난 춤 솜씨로 70여명의 여대생을 농락해 ‘혼인빙자간음죄’로 법정에 섰던 박인수. 당시 26세 해병대 헌병으로 근무하던 그는 해군장교구락부, 국일관 등 고급 댄스홀을 드나들며 뭇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댄스홀에서 여관으로 이어졌던 박인수의 카사노바 행각. 그러나 법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판결로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일간지 기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서울지방법원을 통해서만 보더라도 지난 7개월 동안 도합 68건으로 사흘에 한 건의 비율로 법원 문을 찾아들어 이혼소송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30대 남녀들이라는 것이다. (중략) 이혼소동의 실마리를 들추어 보면 ‘인테리’ 여성, 농가출신의 유부녀가 ‘사교댄스’에 미쳐 밤거리를 쏘다니는가 하면, 경제력이 미약한 남편을 밤낮으로 욕설과 악의에 찬 태도로 대하는 허영녀 등….”
댄스강사 박효씨는 “내가 처음 춤을 배운 곳도 비밀댄스교습소였다. 일본 적산가옥 2층 다다미방에서 비닐장판을 깔고 배웠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안방교습’이라 불렀다. 춤 배우는 걸 감추기 위해 장바구니 들고 교습소를 드나들던 가정주부도 적지 않았다. 비밀댄스교습소에 대한 규제가 풀린 게 91년이었다”고 회상한다.
중동특수와 장바구니 아줌마
이때부터 60년대까지 국내 춤바람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을 타던 빠른 템포의 라틴아메리카 사교댄스 ‘맘보’와 그 뒤를 이은 ‘차차차’가 휘어잡는다. 가수 심연옥이 부른 ‘도라지 맘보’라는 댄스음악이 춤과 함께 인기를 끌었다. 50년대 말에 등장한 록큰롤 댄스의 일종인 ‘트위스트’는 대중들 사이에 “신발 밑창이 닳도록 비비는”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사회악’으로 규정된 사교춤에 대한 단속은 70∼8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강화됐다. 대신 미국에서 상륙한 존 트래볼타 주연의 댄스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가 젊은이들을 ‘디스코’열풍으로 몰아넣었다. ‘제비족 광신회 일당 9명 체포’라는 제목으로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내용을 보면 ‘댄스스포츠’의 어두웠던 과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회악 등 퇴폐풍조 소탕에 나선 경남지구 합동단속반은 마산 진해 등지를 무대로 유부녀 48명을 농락하고 협박 공갈로 돈까지 뺏어온 광신회(제비족) 일당 9명을 체포하고 3명을 수배했다. (중략) 이들은 원양어선 선장부인, 제재소 사장부인, 치과원장부인 등 부유층 유부녀와 처녀, 과부 등을 상대로 댄스교습을 미끼로 유혹 간음한 후 공갈협박으로 금품을 갈취하고…. (중략) 간음행위를 자행하던 상습댄스공갈단 일당 12명 중 9명을 체포하고 같이 놀아나던 유부녀, 처녀 등 48명을 소환하여 엄중조사 중에 있다.”
70년대 후반 우리 사회는 또한번 춤바람의 열기로 몸살을 앓게 된다. 수많은 ‘가장’의 중동진출과 함께 ‘장바구니를 든 가정주부’들이 카바레로 몰려들었던 것. 당시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창립기념 강연회에서 발표된 한 보고서는 “남편과 시부모의 학대 외에 해외취업으로 인한 장기별거로 아내들은 욕구불만이 쌓이고 그 반향으로 가출을 하거나 춤바람이 늘어가고 있다. 30대 주부가 가장 위기이며 이혼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밝히고 있다.
댄스강사 박효씨는 “더 이상 사교댄스를 배우는 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과거 댄스교습과 관련한 떠들썩한 사건들 때문에 지금까지 춤을 배운다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중·장년 층에서는 아직도 사교댄스나 사교춤이라고 하면 카바레와 제비족을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안타까워한다.
‘쉘위댄스’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댄스스포츠’로 통칭되는 춤은 크게 스탠더드댄스와 라틴아메리카댄스(라틴댄스)로 구분된다. 스탠더드댄스에는 왈츠, 탱고, 슬로우, 폭스트롯, 비엔나왈츠, 퀵스탭 등이 있다. ‘파도치듯 떠오르고 내려간다’는 의미를 지닌 왈츠는 우아한 멋을 즐기는 40대 이상 중년남녀에게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왈츠에 비해 비엔나왈츠는 속도가 빨라 경쾌한 느낌을 준다.
“지난해 상영된 ‘탱고’를 본 뒤 댄스스포츠를 배우게 됐다”는 40대 초반의 한 남성은 “정열적이고 환상적인 탱고가 마음에 들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벌써부터 마음속에 은밀한 꿈을 키우고 있다. “정년퇴직한 뒤 탱고의 본고장인 아르헨티나에 가보고 싶다. 여행도 즐기고, 바에서 멋지게 탱고를 추면 근사할 것 같다.”
20대부터 40대 이하 연령층이 즐기는 라틴댄스는 룸바, 삼바, 차차차, 파소도블, 자이브가 있다. 환상적인 리듬과 동작을 가진 룸바는 여성댄서의 춤사위가 특히 매력적이다. 쿠바에서 유래한 차차차는 라틴댄스 중에서 가장 사랑 받는 춤이다. 삼바 춤을 추다 허리를 다친 경험이 있는 전직 교사 출신의 60대 남성은 “그래도 삼바가 좋다. 율동이 생동감 넘친다”고 귀띔한다.
‘사교춤’으로 불리는 댄스스포츠 종목은 아니지만 ‘춤’에 대한 중·장년층 남성들의 묘한 거리감은 재즈댄스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서울 압구정동에서 재즈댄스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곽용근 원장에 따르면 “30대후반부터 50대까지 재즈댄스를 배우러 오는 남성이 최근 부쩍 많아졌다. 5월 이후 갑자기 늘었는데 아마 영화 ‘쉘위댄스’의 영향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강남 일대 두 세 곳에 불과하던 댄스스포츠 학원이 지난 1∼2년 사이 10여개로 늘었다”고 한다. 스스럼없이 ‘사교춤’을 배우려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곽 원장은 “아직까지 중년 남성들은 또래 주부들에 비해 체면치레를 많이 하고 숫기가 부족하다. 수강기간 한 달을 못 채우고 슬그머니 빠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신 여성을 빼고 자기들끼리 팀을 짜서 단체교습을 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교수나 대기업 간부 등 몇몇 남성회원들은 개인레슨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연말이나 휴가철이 되면 회원들의 특별레슨 요구에 시달린다는 곽 원장. “연말에는 파티장에 가서 멋지게 춤추고 싶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강남 일대 30대 부부들 사이에선 춤을 포함한 파티문화가 한창 성행하고 있다.”
국내 부부 댄스스포츠모임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파라클럽’은 해마다 연말이면 시내 특급호텔 연회장을 빌려 댄스파티를 연다. 지난해 12월 이 모임에 정식 회원으로 가입한 홍경식·변종진 부부는 “이때가 되면 전국에서 수많은 댄스 마니아 부부들이 모여 들어 성대한 춤의 향연을 즐긴다. 뿐만 아니라 여름이면 서울 근교 리조트를 빌려 1박 2일에 걸친 야외무도회를 갖는다. 회원으로 가입하기 전 게스트로 초대된 적이 있는데, 그때 약 50쌍 정도 모였다. 음악에 맞춰 서로 파트너를 바꿔가며 춤도 추고 자유롭게 대화도 나누고…. 정말 천국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고 이야기한다.
인터넷에도 댄스열풍
40세 이상 부부들만 가입할 수 있는 파라클럽은 회원심사 기준이 엄격하기로 소문나 있다. “애인은 안되고 반드시 부부여야만 한다. 가입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부부임을 확인받기 위해 호적등본을 제출한다. 언젠가 1년 이상 회원으로 활동하던 커플이 부부가 아닌 게 드러나 강제로 탈퇴시킨 적이 있다”고 홍씨는 귀띔한다.
이밖에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면 각종 댄스모임, 댄스파티 행사는 물론이고 댄스스포츠와 관련한 정보를 담은 홈페이지가 수백개나 뜬다. 각종 댄스스포츠협회는 물론이고 댄스동아리, 댄스전문 바에서 댄스 마니아 개인홈페이지에 이르기까지. 이 가운데 댄스스포츠 열기를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자칭 ‘춤꾼’들이 체험담을 올린 게시판이다.
“이제 사적인 대화를 할 정도로 강습 아줌마 아저씨들과 친해졌어요. 요즘은 자이브(라틴댄스 종목)하는데 머리가 아파요. 차차차 기본 스탭 열가지 배워서 익히나 했더니 자이브…. 헉! 암튼 즐거워요, 재미있고. 진작에 배울 걸.”
“춤보다는 인생이 중요하다. 인생에서 춤보다는 반려자가 더 중요하다. 춤은 취미이고 오락이고 좋은 사람들과 같이 하기 위한 수단이다”
네티즌 ‘바렌티노’의 말처럼 ‘춤은 취미이고 오락이고 좋은 사람들과 같이 하기 위한 수단’이긴 하지만 직장인들에겐 때로 회사와 일자리가 걸려 있는, 목숨을 걸고 배워야 하는 그 무엇이 되기도 한다. 광고회사 기획자로 근무하는 40대 초반 이정국(가명)씨는 올해 초 있을 인사이동을 앞두고 2개월 동안 춤에 매달렸다.
“아이디어와 젊음, 개성이 생명인 광고회사에서 나 같은 40대는 일찌감치 쉰내 나는 퇴물로 찍히기 십상이다. 승진에서 떨어지면 당장 보따리를 싸야 할 판인데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여러 가지 묘안을 궁리하다 연말 고위간부들이 모이는 회식자리에서 무조건 튀고 보자, 강한 인상을 심어주자고 작정했다.”
춤은 비즈니스의 비밀병기
이씨가 택한 것은 재즈댄스. 그의 아내는 “당신 나이에 무슨 재즈댄스냐. 젊은 애들이나 배우는 춤 배우러 나섰다 허리라도 다치면 어떡하느냐”며 펄쩍 뛰었지만 “한 살이라도 젊어 보이려고 개인레슨까지 받아 가며 노력했다”는 이씨는 그의 바람대로 올해 초 보란 듯이 승진했다.
또다른 30대 중반 회사원은 남미쪽 바이어를 잡으려고 지난 6개월간 라틴댄스 강습을 받았다.
“남미 시장 개척 임무를 맡아 처음 브라질 지사로 나갔다. 그런데 브라질 뿐만 아니라 남미지역 어딜 가도 룸바 살사 자이브를 모르고는 비즈니스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은 모든 비즈니스가 파티를 통해 이루어졌다. 파티에서 바이어를 잡아야 하는데 이건 망부석처럼 앉아 있어야 하는 꼴이었다. 할 수 없이 돌아와 춤을 배웠다.”
그는 지난 5월 국내에서 개봉된 ‘쉘위댄스’의 한 장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대낮, 회사 사무실에 앉아 있는 주인공 스기야마. 경리과장답게 책상은 서류들로 어지럽고, 스기야마는 아랑곳없이 일에 몰두해 있다. 하지만 책상 아래로 보이는 그의 발은 춤 스탭을 밟으며 바쁘게 움직인다. 어느새 스기야마의 마음은 댄스교습소 플로어로 훌쩍 날아간다. 누군가와 춤을 추는 착각에 빠진 듯한 스기야마. “당신과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춤을 추어보고 싶었다”는 스기야마의 간절한 바람. 그러나 그의 손엔 마이가 아닌, 계산기가 들려 있다. 마치 다정한 파트너처럼.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부장 직책에 있는 40대 초반 남성은 “사장 이하 간부들이 다 모여 회의 중이었는데 한 간부의 보고가 지루하게 길어졌다. 전날 배운 동작을 익히느라 열심히 스탭 밟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발이 따라 움직였던 모양이다. 옆에 있던 전무님 발을 밟고 번쩍 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50대 초반 성형외과 의사는 “진료실에서 환자가 없는 틈을 타 연습을 한다. 몸이 굳어서 그런지 말을 잘 안 듣는 데다 열심히 외워도 금방 잊어버려 다음 수업시간에 가면 애를 먹는다”고 털어놓는다. “춤에 빠져 있으면 어느새 환자가 들어와도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땐 무척 민망하다. 머리가 허연 의사가 가운까지 입고 ‘원투 차차차’하고 있다고 생각해 봐라. 얼마나 우스웠겠나.”
강습 도중 만난 한 50대 남성은 자신을 ‘정년퇴임자’라고 소개한다.
나한테 춤은 레포츠이자 여가를 즐기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파트너를 자연스럽게 잡는 게 익숙하지 않다. 우리 나이엔 남자 여자가 붙잡고 뭘 한다는 게 어색해서 그런 것 같다.
젊은 나이에 춤을 접하지 못한 게 마냥 아쉬운 듯한 그는 인터넷에 ‘댄스가든(Dance garden)’이라는 홈페이지를 열고 쓸쓸하지 않은 ‘중년의 뜰’을 가꾸고 있다.
요즘 우리 사회 중년 남성들을 ‘춤바람’나게 한 댄스스포츠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함께 춤을 배우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자식들도 다 키웠고, 부부 둘이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얼마전까지는 아무 재미없이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며 살았다. 그런데 춤을 시작하고 나니까 옛날에는 잘 몰랐던 부부간의 정이 새록새록 느껴진다. 왜 진작 이런 좋은 느낌을 나누며 살지 못했나 싶다.”
“생활에 활력이 생기고, 몸도 가벼워진 것 같고. 신나게 춤추다 보면 한결 젊어진 기분이 된다.”
“부부 공동의 목표가 생겨서 좋다. 크고 작은 대회가 국내에만 일년에 20여가지 있는데, 우리 부부가 함께 출전해서 입상하는 게 꿈이다.”
“우리 부부는 틈만 나면 음악을 틀어놓고 집에서 연습한다. 엄마 아빠가 같이 춤추니까 아이들도 좋아한다. 대회에 출전하면 아이들이 응원도 열심히 하러 온다.”
한우용댄스스쿨의 한 원장은 “댄스스포츠에 빠진 사람 중에는 부부가 함께 외국에 나가서 춤을 배우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정통 사교문화와 춤을 알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두 달 가량 레슨을 받느라 5000만원 정도를 썼다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인생에 투자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춤을 알면 인생이 달라진다
매주 토요일 춤을 배우러 춘천에서 올라온다는 강원대 체육교육과 강사 신혜숙(47)씨 역시 열성 댄서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댄스학원까지 운영중인 그가 6개월째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춤을 배우는 이유가 궁금했다.
“개인적으로 댄스스포츠를 시작한 건 5년 정도 된다. 하지만 춤에는 끝이 없다. 배우면 배울수록 완성도가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욕심 때문이다.”
ID가 ‘soogil’이라는 네티즌이 ‘나의 댄스스포츠 체험기’를 통해 고백한다.
“누구 못지 않은 영화 마니아로 지난 10년간 영화와 함께 살았던 나를 춤의 길로 인도했던 그런 귀중한 영화였습니다. 9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춤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전 종영된 영화 ‘쉘위댄스’는 이 땅의 많은 중년남성들을 ‘춤’에 눈뜨게 했다. 예전과 달리 요즘 댄스교습소에선 주인공 스기야마처럼 ‘일상탈출의 행복’에 젖은 중년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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