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징용 배상 판결이 '뇌관'이었다…
최근 한일관계 갈등은 모두 법원發"
'한일 협정 관계' 최고 전문가… 이원덕 국민대 교수
여권 인사 중에는 "지금은 의병(義兵)을 일으켜야 할 때" "아베 편에 서려면 동경 가서 살아라"고 발언했다. 이런 감정적 선동이 국익에 도움 될 리 없다. 좀 늦은 감 있지만 지금이라도 한일 관계가 왜 이렇게 파탄났는지 돌아보고 답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토요일인 13일 저녁, 일본 도요(東洋)대학에서 '한일 관계' 특강 일정을 마치고 막 귀국한 이원덕(57) 국민대 교수를 만난 것은 이 때문이다.
"그저께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를 만나 이번 경제 제재 조치에 대한 속마음을 들었다. 한국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이 명백했다. 정치적 이유로 경제 제재나 보복을 할 수 없어 다른 이유를 갖다대는 것일 뿐 실제로는 이 문제였다."
그는 '한일협정'에 관한 한 국내외 최고 전문가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도쿄(東京)대학에서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했다. 그 뒤 10여 년에 걸쳐 한일협정과 관련된 양국의 방대한 외교 문서를 모두 읽고 해제, 편찬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징용·징병 피해자 보상을 위한 심사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금 사태에는 국내 정치 이용, 과거사 인식 차이, 산업 부문 경쟁 등 복합적 원인이 깔려 있는데, '징용 배상 판결' 문제가 해결되면 일단 진정된다고 보나?
"그게 뇌관이다. 일본 정책 서클에 초청받아 발표할 기회가 있었는데 참석한 공무원, 교수, 언론인 등도 '우리는 아베의 조치를 찬성하지 않지만 한국에서 징용 배상 문제에 대해 답을 안 주니 저러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실질적 해법을 내놓으면 일본은 제재 카드를 접는 명분을 찾게 될 것으로 본다."
―당신이 생각하는 실질적 해법은 뭔가?
"징용 배상과 관련해 우리 정부는 빠진 채 한·일 기업이 기금을 내는 '1+1 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빈껍데기다. 우리 정부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아니면 국제사법재판소에 징용 배상 문제를 맡겨보는 것도 방법이다. 한국 대법원과 일본 최고 법원의 법리가 충돌해 어느 쪽이 맞는지 판단해달라는 것이다. 우리 외교부 쪽에서는 '만약 재판에 지면 후폭풍을 누가 감당하느냐'고 말하는데, 이는 피해자 구제에 관한 문제이지 국가 명운을 건 역사 싸움은 아니라고 본다."
―경제 보복이 눈앞에 진행되고 있는데 국제사법재판소는 너무 멀지 않겠나?
"반도체 핵심 부품 등의 수출 제재 조치는 일본 정부가 언제든지 '목줄'을 쥘 수 있다는 신호만 보낸 것이다.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시켜도 당장 큰 영향이 오는 것은 아니다. 실제 일본의 기업들도 고통을 받고 있다. 이번 조치는 아베 측근과 경제산업성 마피아들이 기습작전 하듯 했다. 외무성 관계자는 '보복 조치를 일방적으로 통보받고 몹시 당황했다'고 말했다. 일본의 지식인 그룹에서는 '일본이 앞장서 국제 분업 구조를 깨는 것에 대해 바보 같은 짓'이라며 비판한다."
―경제 제재 조치에 대한 일본 내 지지 여론은 높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본 대중은 징용 배상 판결로 일본 대상 기업에 대해 강제 집행을 밟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다. 다른 14건이 소송 계류 중이고 900명이 관련돼 있다. 이대로 가면 그 뒤로도 줄소송이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을 손보겠다는데 일본 대중이 왜 찬성하지 않겠나."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는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한인, 조선인 원폭피해자 문제 등 3개 항에 대해서만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고 결론 내렸다. 징용·징병 피해자 문제는 일단락된 것으로 봤는데?
"당시 최고 전문가들이 외교 문서를 모두 검토해 내린 결론이었다. 이해찬 총리는 위원장, 문재인 민정수석은 위원으로 참석했다. 징용·징병 피해자 보상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종결된 것으로 봤고, 다만 그때 받은 돈을 경제 건설에 쓰느라 피해자 구제에 소홀했던 점을 인정해 2007년 특별입법으로 사망자 유족 2000만원, 부상자 1000만원씩 모두 6800억원이나 지급했다."
―2012년 대법원에서 "외교 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할 수 없다"며 뒤집었는데?
"당시 주심(主審)인 김능환 대법관은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고 했지만, 한일 관계에 대형 폭탄을 투척한 셈이다. 그 뒤 박근혜 정부에서 파기 환송돼 다시 올라온 이 건에 대해 지금 같은 사태를 우려해 최종 판결을 지연하려 했던 게 '재판 거래' 적폐 프레임에 걸려든 것이다."
―이런 혐의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구속됐고, 현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손해와 고통에 따른 개인 청구권이 살아 있다'며 최종 승소 판결을 내렸는데?
"법치국가에서 법원 판결을 존중해야겠지만…, 정부가 장기간 견지해온 대일 과거사 정책을 뒤엎어버렸다."
―이런 행동을 '사법 적극주의'라 부른다. 외교 문제에 관해서는 '사법 자제 원칙'이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데?
"국가 간 외교 문제를 다룰 때 여러 측면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국내 시각으로만 자신의 판결이 정의라고 하는데, 국경을 넘어 통용될 수는 없다."
―강제 징용 피해자의 정신적 위자료 등으로 2억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이는 사망자나 부상자 유족 측이 받은 위로금보다 훨씬 많다. 그쪽에서 불만이 나오고 소송도 하지 않겠나?
"노무현 정부 시절 사망자 유족 위로금을 2000만원으로 책정할 때 미국과 독일의 유사한 사례를 기준으로 삼았다. 작년에 대법원 2억원의 판단 근거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론적으로는 전체 피해 구제를 위해 수십조를 더 써야 한다. 작년에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을 환영했던 사람들도 이를 알면 들고일어날 것이다."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법원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가당착(自家撞着)의 우를 범했다. 지금 같은 상황이 되니 해당 판사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
"위안부 문제도 비슷했다. 2011년 헌법재판소가 위안부 배상 분쟁과 관련해 '국민의 권리 보호 의무를 위해 일본에 이의를 제기하지않은 우리 정부의 부작위(不作爲)는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당시 위안부 문제는 일본에서 기금도 만들었고 잠정적으로 끝난 상태로 봤는데 갑자기 이런 판결을 내놓았다. 헌법재판소가 그렇게 하니 다음 해인 2012년 대법원에서 경쟁하듯 폭탄을 던졌다. 최근 한일 관계의 갈등은 모두 법원발(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연두 회견에서 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된 일본 기자의 질문에 "일본 정부는 더 겸허해야 한다. 한국 사법부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식으로 훈계하듯 했다. 일본이 그렇게 얕잡아볼 상대인가?
"일본 국민이 왜 일본 최고 법원이 아닌 한국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해야 하나. 현실적인 방책을 마련하는 게 외교인데 우리는 원리주의에 지배된다."
―오늘의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매국·굴욕 외교였으며 보상금을 너무 적게 받아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역사적 상황에 대한 몰이해다. 일본과 끈질긴 사투를 벌여 '무상 3억달러와 유상 2억달러'를 받아냈다.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종잣돈이 됐다. 경제 발전의 가치를 우선시했기에 피해자 구제에는 확실히 소홀했다."
―불과 몇 년 점령당한 필리핀은 일본에서 5억5000만달러를 받아냈는데?
"태평양전쟁의 전후(戰後) 처리를 위해 체결된 연합국과 일본 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에서 필리핀, 베트남 등은 연합국 일원으로서 배상받았다. 한국은 그런 전승국 지위를 얻지 못했다."
―6·25전쟁 중이어서 외교 활동에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었나?
"미국은 '반공 전쟁'을 수행하는 한국의 위신을 고려해 전승국 지위를 한때나마 검토했으나 영국이 집요하게 반대했다. 모택동의 중국을 일찍이 승인한 영국은 자유중국(대만)과 한국을 조약 서명국으로 인정하는 걸 반대했다. 미·영의 협의 끝에 중국과 한국이 제외됐다. 결국 한국은 '일본에서 분리된 지역'으로 규정돼 협상 출발점부터 배상을 요구할 법적 권리를 갖지 못했다. 양국 간 재산 및 청구권을 '특별 조정(special arrangement)'하는 걸로 됐다."
―일본에 공세적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였나?
"당초 방대한 배상 요구안을 세웠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민사상 재산의 반환, 채권의 상환 등 재산청구권 처리의 범주에서 '대일 8개 항 요구'로 정리했다."
―청구권 협상에서 한반도에 남겨진 일본인 재산이 쟁점이 됐다. 1946년 기준 재산 총액은 52억달러, 그중 22억달러가 남한에 있었다. 미군정은 남한 내 일본인 재산을 몰수한 뒤 1948년에 한국 정부로 넘겨줬다. 일본은 이에 대해 '역(逆)청구권'을 제기했는데?
"한국 측은 '불법 식민 지배에서 축적된 재산 몰수는 당연하다'고 몰아붙였다. 논쟁 과정에서 '일본이 식민통치 기간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는 일본 측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의 망언(1953년)이 나왔다. 회담은 5년간 중단됐다. 미국이 중재에 나서 '일본이 역청구권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표명했다. 그 뒤 협상이 재개됐지만 8개 항목 대부분이 일본에 의해 거부됐다."
―박정희 정부에서 어떻게 타결을 보게 됐나?
"개개의 보상 근거나 명목을 따지지 않고 총액 타결 방식으로 바꿨다. 1962년 협상 당시 서로 제시한 금액은 7억달러 대(對) 7000만달러였다. 이를 좁혀가는 협상 이 계속되다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상 간에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차관 1억달러'로 타결을 봤다. 이는 JP 결정이 아니었다. 하루 전에 박 대통령이 '무상보다 유상이 많아서는 안 되고 합쳐서 6억달러를 지켜라'는 훈령을 보냈다. 당시 방대한 문서를 보면 얼마나 길고 힘든 싸움이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대단한 역량을 보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14/20190714020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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