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진술'도 처벌 못 하는 나라
빗길 교통사고를 내고 잠적했다가 21시간 만에 나타난 방송인 이창명씨는 음주운전 혐의를 끝까지 부인했다. 그와 함께 음식점에 있었던 지인 다섯 명 중 신원이 확인된 두 명도 경찰 조사에서 "이창명은 술을 안 먹었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은 음주운전이 확실하다며 얼마 전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로 넘겼다. 검찰이 기소하면 법정에서 진실 공방이 벌어질 것이다.
누구 말이 맞는지 아직 단정할 순 없다. 다만 경찰이 확인한 정황 증거만 보면 음주운전 혐의가 짙은 건 사실이다. 이씨는 지난 4월 20일 밤 서울 여의도에서 신호등을 들이받고 차량을 방치한 채 자리를 떠났다. 뒤늦게 경찰에 나온 그는 "너무 아파 병원에 갔을 뿐 잠적한 게 아니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씨가 운전하기 전 식사를 했다는 식당 CCTV에서 생맥주 9잔과 41도짜리 소주 6병이 식사 장소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 이씨는 사고 직후 병원에 들러 의료진에게 '소주 2병 마시고 운전하다 사고를 냈다'고 말한 것으로 진료기록부에 적혀 있다. 이씨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의사와 간호사는 "이씨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씨는 피의자, 지인 두 명은 참고인 신분이다. 음주운전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경찰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그들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다. 법정에서 하는 거짓말은 위증죄로 처벌받지만 수사기관에서 하는 거짓말은 방어권 차원에서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그랬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미국은 참고인은 물론이고 피의자가 수사기관에서 무죄 주장을 위해 거짓말을 한 것도 허위진술죄로 처벌한다. 5년 이하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한다. '살림의 여왕'으로 부르는 마사 스튜어트가 2004년 징역 5개월을 선고받은 것도 내부 정보를 이용한 주식거래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관련자와 입을 맞춰 수사를 방해하고 조사관에게 허위진술한 것 때문이었다.
미국 헌법은 묵비권을 보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말할 특권'을 부여한 것은 아니라는 확고한 원칙을 세우고 있다. 피의자든 참고인이든 입을 다물 권리는 보장하지만 일단 입을 열면 진실을 말해야 한다. 피의자 인권을 보장하면서도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한 보완 장치를 함께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이 작년에만 1688명이다. 증인 선서를 한 법정에서도 이런데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 수사기관에서의 허위진술이 얼마나 될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한자리에서 일곱 번 진술을 바꾸는 사람도 봤다"는 검사도 있다. 돈 받고 경찰에 나가 거짓말을 해주는 '가짜 알리바이 진술 대행업체'까지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우리 헌법도 묵비권을 보장한다. 그러나 진술 거부와 거짓말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거짓말 이 판치면 악랄한 범죄자가 법망을 빠져나가고 엉뚱한 사람이 처벌받을 수 있다. 수사·재판이 길어져 사회적 비용도 늘어난다. 한명숙 전 총리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줬다고 했다가 말을 뒤집은 건설업자의 위증 때문에 한 전 총리에 대한 확정 판결이 나오기까지 무려 5년이 걸렸다. 우리도 허위진술죄 도입을 검토할 때가 됐다. 수사기관이 아니라 사회 정의를 위해서다.
출처: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5/30/20160530029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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